<중국여행기>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사람들은 흔히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으로 진시황과 수양제를 꼽는다. 오늘은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고 중국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진시황이 그의 사후를 대비하여 지하 궁전을 짓고 대군단의 토용(土俑)을 만들어서 매설해 놓은 현장을 찾아간다. 서안 시내를 빠져나와 50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적한 시골길 들판을 달리는 차창으로 멀리 나직한 산봉우리가 보였다. 가이드가 숲으로 싸인 그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진시황릉’이라고 말했다.
진시황(秦始皇)은 부왕인 장양왕이 죽자 13살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린 왕이기에 10년 동안 승상 여불위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 차츰 나이가 들어 왕으로서의 권한과 역할을 깨닫게 되자 여불위를 몰아내고 친정(親政)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때 나이 22살이었다. 왕권을 장악한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품고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시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BC 230년부터 BC 221년까지 10여 년간, 치열하고 처절한 전쟁을 거쳐, 한, 조, 연, 위, 초, 제 등의 제후국을 멸하고 39세에 분열된 천하를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먼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황(皇)과 제(帝)를 따서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제국의 영원한 존속을 바라면서 처음 황제인 자기를 ‘시황제(始皇帝)’라고 하였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고, 직제와 법제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적 봉건 제국을 건설해나갔다.
한편으로 도량형과 문자와 화폐를 통일하여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훌륭한 업적을 남겨, 천고(千古)에 제일가는 황제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북방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150여만 명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쌓는 대역사를 시작하였고, 병행하여 추진한 아방궁 공사와 70여만 명을 투입하여 여산 전체를 자신의 능묘로 축조하는 공사에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혹사시켰다. 더욱이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라’는 명을 어겼다는 핑계로 학자 460여 명을 생매장시키고, 역사와 의술·농경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운‘분서갱유’사건 등 그의 철권통치는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과격하고 무리한 정책은 수많은 백성들을 죽음과 노역으로 몰아넣었고 정책 시행을 위한 악법은 더욱 강화되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강력한 정복 군주였지만 많은 내부의 적이 생겨났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신하들의 보복과 배신의 두려움에 떨었고, 사후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지내다가, BC 210년 국토 순행 중에 병이 들어 50세의 나이로 훙서(薨逝)했다.
정복과 폭정의 대가로 받은 두려움으로 일생을 공포에 질려 살다가 간 진시황은 사후에도 자신에게 도전해 올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 생전에 황릉 공사를 하면서 궁전 호위군단과 같은 규모의 병마를 토용으로 만들어 황릉 사방에 매립해 놓았다고 한다. 그 일부가 1974년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박물관’이다. 박물관 내부에는 3곳의 용갱과 진시황제 문물 진열청이 있다.
제 1호 갱은 동서 230m, 남북 62m나 되는 넓은 면적에 10줄의 갱을 파고 6,000여 점의 도용(陶俑)과 도마(陶馬), 그리고 50대의 전차가 실전 배치 상태로 늘어서 있다. 목이 없거나 팔이 잘려 파손된 것도 있지만, 모두 실물 크기로 만든 병사들은 장군, 장교, 병졸에 따라 복색도 다르고 차림이나 표정도 다르다. 조각이 너무나 섬세하고 정교하여서인지 해설사는 그 당시 생전의 인물들을 그대로 제작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하였다. 지금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일사불란하게 적진을 향해 달려 나아갈 것 같은 태세다.
죽은 뒤의 저승은 형상이 없는 세상이라고 하는데, 황제인들 저 넋 빠진 흙덩이 허수아비들을 한번인들 부려본 적이 있었을까? 간사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를 믿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백성들이 희생을 당하였겠는가? 무명(無明)을 깨닫지 못한 인간이 만든 저 죄업의 모습에 가슴이 저미어온다.
제 2호 갱은 1호 갱보다 조금 규모가 작은데 궁노병, 보병, 차병, 기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89대의 전차, 2000여 개의 도용과 도마가 도열해 있다.
3호 갱은 더 면적이 좁고 72점의 병마용과 전차 1대가 발굴되었는데 이곳은 군진의 지휘부인 군막이라고 한다. 아직 발굴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는데 중국 정부에서는 유물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방법을 확립할 때까지 발굴을 중단하고 있다고 한다.
전시장 한 편에는 입사용(立射俑:서서 활 쏘는 모습), 궤사용(跪射俑:앉아서 활 쏘는 모습), 기병(騎兵)이 역동적인 모습으로 관람객 눈높이에 전시되어 있어, 바로 곁에서 그 세밀한 표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시황 문물 진열청에는 황릉 봉토 부근에서 출토된 네 마리의 말이 생생한 모습으로 수레를 끌고 있는 동거마상(銅車馬像)이 여러 가지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진시황릉의 호화롭고 거대한 지하 궁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 없었던 중국 고고학회가 그 내용이 사실임을 차츰 밝혀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그 거대한 지하 궁전의 일부분인 병마 용갱을 보고도 세상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는데, 저 큰 산 같은 황릉과 그 둘레에 묻혀있을 지하 궁전이 모두 발굴되어, 그 전체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기적으로 기록되고도 남을 일이다.
끊임없이 기적을 창출해 온 진시황이 죽자 진 왕조는 기울기 시작했다. 참혹한 형벌과 가혹한 법률, 200여만 명의 인부를 징발한 대규모 토목공사, 극심한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착취로 백성들의 삶은 유린당하고 국력은 소진되었으니, 급기야 농민들이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는가! (王侯將相 寧有種乎)’
라고 외치며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질세라 참아왔던 지방 호족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 우리의 귀에 익숙한 영웅이 항우와 유방이다. 진나라에 항거하여 질풍노도처럼 세력을 떨치던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의 사면초가(四面楚歌) 작전에 밀려 결국 자결하자, 유방은 한(漢)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로부터 서한, 신, 동한, 삼국 시대로 쪼개지니 진왕조의 영속을 꿈꾸던 진시황의 통일 제국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중국 역사상 15년이라는 가장 짧은 왕조로 기록되고 만다.
죽어서도 놓지 않으려던 진시황의 권력과 권위, 그리고 부귀영화는 그 많은 궁전의 보물도, 철갑의 호위 군단도 끝내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이 어이없는 유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민심을 외면한 권력은 결국 허무하게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입구를 나오면서 병마용 박물관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저 많은 지하의 도용들은 황제에 얽힌 풍운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오로지 지하 궁전을 묵묵히 호위하고 있을 뿐이다.
불교 경전 자경문(自警文)에 ‘삼 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가 되어도,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된다.(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는 글귀가 떠오른다. 진시황이 삼 일만이라도 마음을 닦았다면 그의 통일 제국이 유구(悠久)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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