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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 용문 석굴

주비세상 2011. 6. 6. 22:56
<중국여행기> 

용문 석굴(龍門 石窟)

 

 

 그 옛날 영웅호걸들이 웅지를 펼쳤던 낙양(洛陽)은 황하 문명의 주요 발상지로 황하(黃河) 강 중류인 하남성 낙하(洛河) 유역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770년 주 평왕(周 平王)이 이곳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 하, 상. 서주, 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등 13개의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고, 이 나라들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낙양을 역사 도시로서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다.

 유명한 문화 유적으로는 중국 최초의 불교 사원인 백마사, 중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손꼽히는 용문 석굴, 천진교, 관림, 낙양 고묘 박물관, 모란 공원, 백거이 묘 등 고적지가 즐비하다. 우리는 이 중에서 이하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용문 석굴과 향산사, 그리고 백거이(白居易) 묘가 있는 백원(白園)을 찾아갔다.

관광객을 위해 조성해 놓은 시설 지구에 내려 전기 자동차의 유혹도 외면하고 화사한 봄볕이 강물 위에 반짝이는 수양버들 늘어진 강변길을 따라 북쪽 입구까지 산책을 했다. 강변에 높은 성벽을 쌓아 막은 아치형 출입문 위쪽에 용문(龍門)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용문 석굴은 북위(北魏) 때인 427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400여 년 동안 조성한 불교 유적으로 현재 2,345여 곳의 석굴과 벽감(壁龕), 2,800여 개의 비문(碑文), 50여 기의 불탑(佛塔), 10만 점 정도의 조각상이 용문산과 향산사 옆까지 강변 암벽을 따라 1.5km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황하의 홍수를 멋지게 다스린 우왕(禹王)의 작은 샘물 우왕지(禹王池)를 지나 오른쪽 바위 절벽을 올려다보니, 크고 작은 석굴과 감실이 불규칙하게 촘촘히 다듬어져 있고, 그 안에 석불과 불탑을 10만여 점을 모셔 놓았다. 큰 불상은 높이가 10m 이상 되는 것부터 수 cm에 불과한 것까지 실로 다양하다. 이 불상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며 정교한 솜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절벽을 오르는 계단을 따라가면 발길마다 부처님이고 눈길마다 보살님이니 오랜 고행이나 수도로 청정한 몸을 얻은 저 고귀한 분들만의 마을에

 ‘감히 속세의 탐진치(貪瞋癡)에 켜켜이 절여 있는 이 몸을 들여놓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선뜻 발길이 옮겨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많은 불상 조각의 코나 눈이 없어지고, 팔이 떨어지고, 목이 없어지고,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심하게 몸이 망가져 처음의 맑고 심오한 모습을 느끼기는 어렵지만 오랜 역사 속에 묵묵히 비추어 온 그 혜안(慧眼)과 법안(法眼)은 아직도 남은 부분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용문 석굴에는 특별하게 큰 석굴이 세 곳이나 있는데, 가장 먼저 만난 큰 석굴은 벽면에 석실(石室) 셋을 이웃하게 파고 큰 불상을 모신 ‘빈양삼동(賓陽三洞)’이라는 석굴이다. 이 석굴은 용문 석굴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것으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어머니께 덕을 쌓아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 셋 중에서 가운데 석굴만 완성하는데도 80여만 명이 24년간에 걸쳐 만들었고, 좌우 두 석굴은 당나라 때 완성되었다고 한다. 입구 좌우에 무서운 신장(神將)들이 조각되어 있고, 넓은 석실 가운데는 부처님 좌상을 모셨다. 부처님을 둘러 싼 벽면에는 많은 보살 입상이 부조로 조성되어 있다. 부처님 뒤쪽 벽에는 도인의 광체가 사방으로 퍼지는 문양으로 광배(光背)를 새겼고, 천장에는 연꽃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데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잠시 눈을 감고 처음 이 석굴이 조성되었을 때의 법회를 생각해 본다. 오색단청으로 아름답게 꾸며놓은 석실 안 연화 좌대에 부처님께서 앉으시어 둘러 선 보살들과 법희(法喜)를 즐기시면, 그 앞에 중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경배를 올렸으리라. 이 때 천장에서 꽃비가 내리고 금빛 광배가 눈부시게 석실을 비추었으리라. 무명에서 깨어나라는 부처님의 끝없는 무정 설법(無情 說法)은 자비의 향기가 되어 저 강물에 퍼져 내리고, 강물은 감로수로 변해 온 누리에 방산(放散)되었으리라.

 계단을 따라 가는 동안 손닿는 곳마다 사람들이 지나면서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반질반질하게 닳아 까맣게 된 석불을 볼 수 있었다. 고해를 떠난 석상의 공덕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는 사람들의 애절한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찾은 큰 석굴은 ‘만불동(萬佛洞)’이라는 석굴이다. 역시 석실 가운데에 부처님 좌상을 모셨으며, 뒤쪽 하단에 보살 입상을 조각하고 상단에는 이글거리는 불꽃 광배를 새겨 채색하였다. 둥근 천장에는 연밥[蓮菓]을 중심으로 연꽃 한 송이를 커다랗게 새기고 연꽃 둘레에 무슨 뜻인지는 모를 한자(漢字)를 써서 둥글게 마감하였다. 좌우측 벽은 빼곡하게 칸을 만들어 손가락 길이만한 작은 불상을 조각하여 한 칸에 한 분씩 모셔서 벽면을 가득 채웠다. 석실 밖 벽까지 이런 조각이 보인다. 각각 다른 표정을 하고 있어 더욱 눈길이 가는 이곳을 ‘만불동’이라 한 것은 만여 개의 작은 불상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 석굴은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만수무강과 사후의 극락왕생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용문 석굴의 백미는 단연 ‘봉선사(奉先寺)의 노사나불’을 꼽는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노사나불은 높이가 무려 17.14m로 머리 크기만 3m라고 하니 그 크기에 위압감을 느낀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 떠 만든 것이라 하여 더욱 호기심이 갔지만, 세월의 흔적으로 훼손된 유적 복구 작업이 한창이어서 철 구조물 사이로 어렴풋이 노사나불의 윤곽만 살펴 볼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조각한 천왕상의 모습만 보아도 지금까지 살핀 석불에 비해 크기가 월등할 뿐만 아니라, 조각 또한 정교하고 날렵하여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보수공사로 가려져 거대한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

 아쉬워하며 돌아서서 이하 강을 굽어본다. 잔잔한 강물 위로 두 척의 반야 용선이 미끄러지듯 비껴지나 간다. 강 건너 편 향산사의 승려들은 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수행의 인고를 달래며 저 반야 용선을 타고 이곳 용문에 들어오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천천히 용문 석굴을 내려오면서 마치 청정수에 번뇌를 씻은 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기분이 상쾌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