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기>
자은사 대안탑과 북광장
서안(西安)으로 가는 중화고속철로(CRH)에 올랐다. 열차의 겉모양과 내부 구조가 우리나라 KTX와 비슷하다. 시속 380㎞로 쾌속 질주를 하는데도 흔들림 없이 편안하다. 달리고 달려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것은 광활한 평원과 강과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뿐이다. 밀밭이 눈이 시리도록 파란 들판에는 농사철이 아닌지 일하는 사람이 없고, 마을에도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아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터널도 없는 대 평원을 달리기만 하니 끝없는 벌판 한가운데 내가 던져져 있는 듯 따분한 생각이 든다. 아기자기한 우리나라 강산이 그리워질 무렵 남쪽 창가에 앉은 친구들의 ‘와’하는 감탄의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차창 멀리 우람한 무초산지대(無草山地帶)의 산봉우리들이 햇볕에 번뜩이고 있었다. 놀랍다. 저 많은 봉우리, 저 높은 산이 옷을 벗은 채 육중한 육체를 드러내고 차창 가득히 부끄럼 없이 다가오다니……. 나중에 알아보니 이 산이 중국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강하여 각국의 도인(道人)들이 기(氣)를 받으러 찾아온다는 바위산인 화산(華山)이었다.
종점인 서안북역에 내려 새로운 조선족 가이드와 미팅을 끝내고 준비해온 미니버스에 올라 서안 시내로 향했다.
서안은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 손꼽히는 도시이다. 기원전 11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13개의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고, 서주(西周), 진(秦), 서한(西漢), 당(唐) 왕조 때 흥성했던 도시로, 유럽의 로마와 함께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 역사에 나오는 당나라 수도 ‘장안’이 바로 이 도시이다.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대패한 당 태종, 걸출한 여제 측천무후, 신라를 도와 백제를 섬멸하고 김유신에게 목숨을 잃은 소정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인물들의 활동 무대가 바로 이곳 서안이었다.
동서양 문화교류의 중요한 교역 통로 실크로드의 기점이었던 서안은 세계 8대 기적 중의 하나로 불리어지는 진시황 용마 용갱, 그리고 시내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서안성,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한 화청궁을 비롯하여 중국 고대 문명의 진귀한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 사람들은 ‘오천 년 중국 역사를 서안에서 모두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버스는 거대한 서안성(장안성)이 차창에 나타나자 성벽 아래로 난 넓은 도로를 따라 복잡한 자동차들을 이리저리 재치고, 대안탑이 건너다보이는 북광장 앞에 도착하였다. 대로변에 인접한 북광장은 입구에 커다란 돌기둥 조형물이 4개가 서 있고, 장방형 연못이 남북으로 낮게 층을 이루며 이어져 있는 분수공원이다. 연못마다 분수 꼭지를 빽빽이 설치하여 하루에 몇 차례씩 분수 쇼를 연출한다고 한다.
때마침 하늘 높이 뿜어 오르는 물줄기는 음악에 맞춰 우아하게 아름다운 선율을 그리며 춤을 추고, 보고 있던 사람들은 날아오는 물보라에 환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희뿌연 물안개가 가득 찬 하늘을 웅장한 대안탑이 그윽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듯 자비롭게 서 있다.
자은사(慈恩寺)와 대안탑(大雁塔)은 당(唐) 제국의 세 번째 황제인 당 고종 이치와 관련되어 있다. 자은사는 아버지 당 태종 이세민이 사망하기 1년 전인 648年에, 당 고종이 1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 왕후를 위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자모은덕(慈母恩德)의 뜻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
이 절은 황실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사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당시 절 내 승방(僧房)이 1,897칸이 있었고, 전당(殿堂)과 탑원(塔院)이 있었다. 그리고 회랑(回廊)에는 고급목재를 사용하였고, 주옥금취(珠玉金翠)와 오안육색(五顔六色)의 채회를 하였으며, 오도자(吳道子), 윤림(尹琳), 염립본(閻立本), 정건(鄭虔), 왕유(王維) 등 저명한 화가들이 자은사에 벽화를 그렸다고 전하고 있다. 당대(唐代)의 자은사는 당말(唐末) 전란에 의해 훼손되었고, 후에 사원을 여러 번 중수하였지만 모두 당대의 규모에 이르지 못하였다. 현존하는 사원 건물은 당대 자은사의 서원(西院)에 해당된다.
대안탑(大雁塔)은 명나라 때 지은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삼장 법사와 관련이 있다. ‘삼장 법사’는 불교 경전인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모두 정통한 사람을 이르는 말인데, 그가 바로 현장(玄裝) 스님이다.
현장 스님(602-664)은 하남성 낙양 근처에서 태어나 13세에 낙양 정토사로 출가하여 ‘현장’이란 법명(法名)을 받았다. 경전을 연구하다가 번역본이 원본과 맞지 않음을 알고 천축국(天竺國:인도)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28세 때인 628年 현장 스님은 홀로 몰래 장안을 출발해 천축국으로 떠났다. 800리 사막 길을 붉은색 노마(老馬)를 타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걸어갔다. 인도 나란다 대학에 15개월 동안 머무르며 106세의 계현(戒賢) 스님에게서 유식학(唯識學)을 배우고, 13年 동안 인도에 머무르며 불교 철학과 범어를 완전히 익혔다.
41세 때인 641年 가을, 520상의 불상(佛像)과 진신사리(眞身舍利), 657부의 경전(經典)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천산 남로를 이용하여 장안에 돌아왔다. 중국을 떠난 지 17年 만인 645年, 그의 나이 45세였다. 장안에 돌아온 현장 스님은 융숭한 환영을 받았고, 19년간 불경 역경 사업에 전력을 다 했다. 또한 스님은 당 태종의 명에 따라, 오랜 시간에 걸쳐 다녀온 중앙아시아와 인도 등 138개국의 역사 지리, 정치, 불교 현황을 총망라한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그는 대안탑을 세워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관하였다. 664年 현장 스님이 63세로 대자은사에서 입적하자, 당 고종은 3일간 조회를 폐하여 스님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대안탑의 명칭은 현장 법사가 인도를 향해 가던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 버렸는데, 그 때 어디선가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길을 인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현장 법사는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부처님이 기러기로 현신하였을 것이라 생각하여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안탑(雁塔)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탑은 652年 처음 건립할 당시 5층 4각 누각이었는데, 현장 법사의 요구로 탑으로 쌓았으나 후에 무너졌다. 그 뒤 측천무후가 7층탑으로 다시 세웠고, 당(唐) 8대 황제인 대종(代宗)이 10층으로 재건하였지만 전쟁으로 파괴되어 7층만 남았다. 현재 우리들이 보는 대안탑은 7층이며, 높이가 64m이고, 계단은 284개로 제일 높은 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아쉽게도 대안탑에 입장하지 못하고 분수 쇼의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그 웅장한 모습만 우러러보았다. 분수 연출이 끝나가고 서안의 해넘이가 물안개 속으로 어릴 때 쯤, 우린 서둘러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 여행에서 단 한 번 한식을 하게 되는데 바로 오늘 저녁이다. ‘한국 요리-景福宮韓國料理’라는 한글 간판에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들어갔다. 삼겹살 불고기가 예약된 메뉴였다. 중국에 와서 끼니마다 회전 식탁에 오르는 많은 음식들이, 오미(五味)를 골고루 내는 우리 한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음식뿐이었다. 평소에 술을 꺼리던 나는 그 느끼한 맛 때문에, 평소에 먹지 않던 그 독한 고량주(高粱酒)를 자청하여 반잔씩 마셨다.
식탁 구이판에 삼겹살이 오르고 상추와 마늘이 나오자, 우리 모두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덤벼들어, 고기를 굽고 상추쌈을 싸서 먹기 시작했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함께 나온 밥공기를 열어보니 쫀득한 밥알에 윤기가 반짝반짝 흐른다. 역시, 우리 입에는 우리 음식이다.
소담(笑談)을 나누며 고량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세 사람이 술잔을 받아 놓았는데 벌써 구이판에는 마지막 안주 한 점만 동그라니 남아있었다.
“형님이니 자네 안주일세. 아우님 수고 했으니, 자네 안주일세.”
서로 자네 안주라면서 상대방에게 명덕은 소정께, 소정은 청담에게 단호하게 권하였다.
아무도 그 안주를 먹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먼저 명덕과 청담이 술을 마시고 다른 반찬으로 안주를 하는 듯하 더니, 청담이 슬그머니 그 마지막 남은 한 점 고기 안주를 집어갔다. 소정이 그제야 부담이 없어졌다는 듯 술잔을 비웠다. 김치 안주를 하려는데 청담이 상추쌈을 집은 젓가락을 소정에게 내밀었다.
“자네 주려고 안주를 상추에 싸서 기다리고 있었네. 자, 들게!”
할 수 없이 소정은 부끄러운 듯 그 안주를 받아먹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음식으로 정(情)을 나누었다. 한 잔 술에도 정이 들고, 콩 반쪽에도 정이 든다고 했다. 그만큼 물질보다 정(情)이 사람과의 어울림이나 사귐에서 중요함을 알고 오래도록 정다운 삶을 실천해 왔다. 오늘 저녁 우리의 음식, 한식을 먹으니 우리의 아름다운 정(情)이 더욱 피어나는 만찬이 되어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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