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기>
향산사와 백원
용문 석굴은 이하 강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석굴을 ‘서산 석굴’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석굴을 ‘동산 석굴’이라 한다. 용문산 끝자락에 놓인 이하 강의 긴 다리를 건너면 향산(香山)에 자리 잡은 동산 석굴이 향산사(香山寺)로 가는 길 따라 띄엄띄엄 나직하게 올려다 보인다. 서산 석굴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지나치고 향산사로 향한다. 길가에는 일생을 구법(求法)에 몸 바치신 현장(玄裝), 선무외, 신회, 금강지 등 당대의 고승들의 조각상이 줄지어 서서 강 건너 벌집처럼 보이는 용문 석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돌계단을 올라서니 바로 향산사 현액이 걸린 일주문이다. 크지 않은 절이라서 당우(堂宇)가 조밀하게 배치되어 아담하게 느껴졌다. 드높은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쌍둥이처럼 양쪽에 마주하고 있고, 천왕전, 나한전, 대웅보전이 조금씩 높이를 달리하며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사찰에서도 예배를 올릴 때 향을 공양하는데 향로는 모두 전각 앞에 설치해 놓았다. 아마도 향이 굵고 길어 뿜어내는 향연(香煙)이 전각을 훼손시키기 때문인 것 같다. 어느새 명덕과 소정과 청담이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경배한다. 우리는 주련(柱聯)에 적힌 글을 읽고 음미하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공부가 인생 최상의 과제임을 다시 한 번 인지해본다.
到處能安皆樂土(도처능안개낙토) 가는 곳 마다 마음이 편하면 그 곳이 바로 극락이요,
此心無障是菩提(차심무장시보리)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전각을 한 바퀴 돌아나와 앞을 보니 그림 같은 이하 강과 용문 석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원(白園)으로 가는 길목에 당나라 3대 시인인 두보(杜甫),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아홉 문인(文人)들의 서 있는 초상을 오석(烏石)에 그려놓은 구로당(九老堂)이 보인다. 우리는 참배를 마치고 바로 옆에 담장으로 이어지는 백원으로 들어갔다.
백원(白園)은 백거이가 잠들어 있는 묘원(墓園)이다. 묘소로 가는 길은 숲이 우거지고 새소리도 들리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커다란 목련이 해맑게 피어있는 묘 앞에는 당태자소부향산백문공묘(唐太子少傅香山白文公墓)란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갖가지 기념비가 줄지어 서 있다. 봉분(封墳)을 護石(호석)으로 동그랗게 둘러막았는데 벌초를 한 흔적이 없고, 분상(墳上)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우리나라 능원(陵園)이나 묘지는 해마다 후손들이 깨끗하게 벌초하고 정성껏 관리한다. 그것이 조상에 대한 당연한 도리라고 믿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위대한 시인인 고인의 명성에 비해 후세 사람들의 정성이 소홀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중국인들은
‘묘에는 나무가 잘 자라야 명당이고, 영혼이 좋은 곳으로 환생했다.’
고 생각한다니 나라마다 다른 문화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백거이(白居易)는 772년 하남성 신정현에서 태어나서 846년 75세로 사망하였으며, 자(字)를 낙천(樂天), 호(號)를 취음 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 거사(香山居士)라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백낙천(白樂天)으로 더욱 익숙해져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천재로 불리어졌으며 학식이 남달리 뛰어나 29세에 최연소 진사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처 태자소부( 太子少傅)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죽은 뒤에 태어난 그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겨 어떤 문학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시사 문제, 서사적(敍事的) 제재에 기초한 장대한 시편과 인생과 자연계의 사변적(事變的) 작품을 백씨문집(白氏文集)에 3,840여 편이나 남겼다.
주옥같은 작품들 중에서도 그가 36세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안녹산의 난으로 당 현종이 양귀비를 잃게 된 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장한가는 당시(唐詩) 가운데 걸작의 하나로 손꼽혔으며, 낙천의 탁월한 상상력과 선율로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구구절절하게 표현한 7언(言) 120구(句) 840자(字)로 된 장편 서사시(敍事詩)이다.
장한가가 발표되자 중국의 각 고을 저자에서, 기방에서, 문인들 사이에서, 이 시(詩)의 구절을 암송하고 노래로 부르기도 하여 크게 회자(膾炙)되었고, 우리나라 문인들에게까지 애송되었다고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할만하다. 한편, 고려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백낙천의 장한가를 읽고 고구려 건국의 신화인 ‘동명왕편’을 5언 282구의 장편 대서사시로 지어 우리나라가 성인의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기도 했다.
또한,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상대방을 떳떳하게 대할 수 없을 때’를 ‘무안(無顔)하다’고 하는데, 이 말이 장한가의 한 구절인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네 번째 구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回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눈동자를 돌리며 한번 웃으면 백가지 교태가 생겨나고,
六宮粉黛無顏色(육궁분대무안색)
육궁의 분 바르고 눈썹그린 미녀들은 낯빛이 무안해졌네.
2,800여 수의 시(詩)를 남긴 백거이는 사람의 글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이 으뜸이고 육경 중에는 시(詩)가 으뜸이라고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데에는 정(情)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말보다 처음인 것이 없으며, 소리보다
진실 한 것이 없고, 뜻보다 깊은 것이 없다. 시(詩)는 정을 뿌리로 삼고, 말을 싹으로 하고,
소리를 꽃으로 하며, 뜻을 열매로 삼는다.’
고 시를 예찬했다.
말년에 백거이는 18년간 향산에 은거하여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가 당대의 유명한 도승이신 도림 선사(道林禪師)를 찾아 공부한 일화가 남아 있다.
백낙천이 항주 태수가 되었을 때 가르침을 받고자 도림 선사를 찾아갔다. 선사는 청명한 날이면 곧잘 소나무 가지에 올라앉아서 좌선(坐禪)하기를 즐겨했다. 그가 절에 가서 선사를 찾으니 나무위에 앉아있었다.
"선사님, 나무 위는 위험하니 어서 내려오십시오."
도림 선사는 태연히
"네가 서 있는 땅 보다 내가 앉아 있는 나무 위가 더 안전하다."
명리와 이해가 엇갈리는 속세가 더 위험하다는 가르침이었다.
도림 선사는 찾아온 손님이 백낙천인지라. 마지못해 나무에서 내려와서 말씀하셨다.
“그래, 무슨 일로 이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가?”
“네, 평생에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법문을 얻고자 찾아뵈었습니다.”
백낙천이라면 학식이 뛰어난 사람인데 나에게 법문을 청하러 오다니 도림 선사는 섣불리 아무 말이나 일러줄 수 없는 상대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도림 선사는 서슴지 않고 게송을 일러주었다.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선행을 받들어 행하면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리. 이렇게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基意 是諸佛敎)”
“삼척동자도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을 일러 주시다니요?”
“삼척동자가 알기는 쉬워도 백세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울 걸세.”
백낙천은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다.
그 후 백낙천은 악(惡)을 멀리하고 선(善)을 행하였음은 물론 스스로 마음을 밝히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혼자서 고심하다가 하루는 또다시 도림 선사를 찾아갔다.
“스님,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니라.”
순간 백낙천의 생각은 앞뒤가 모두 끊어졌다. 그러다가 순간 ‘오’ 하고 탄성하며 허공보다 더 큰 의심덩어리를 타파하였던 것이다.
백원을 내려와 강가에 이르니 모두 기운이 빠진 듯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마침 용문 입구에서 향산사 앞을 왕복하는 10인승 전기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차에 올랐다. 용문교를 스치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잿빛 용문 석굴과 아담한 향산사와 백원을 다시 돌아보았다. 산과 강과 사찰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곳에서 인간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문화의 자취를 시공을 초월하여 함께할 수 있음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현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서안으로 가는 중화고속철로(CRH)를 타기 위해 낙양역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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