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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 서안성

주비세상 2011. 6. 7. 11:26

<중국여행기>

서안성

 

 

 

 중국의 6대 고도(古都)의 하나인 서안(西安)은 시내 한복판에 서안성(西安城)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치 고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위용을 과시하며 처음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아버린다. 회색빛 벽돌로 촘촘히 높이 쌓은 성벽을 차창으로 올려다보며 도착한 곳은 서안성 동문 앞이다. 해자(垓字) 위의 다리를 건너 장락문(長樂門)이란 문호가 붙은 홍예로 된 둥근 성문을 들어가 두터운 성벽을 지나니 옹성(甕城) 안의 사각의 광장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또 하나의 성문이 가로 막고 있다. 옹성의 귀퉁이에 있는 좁은 계단을 따라 성으로 올라갔는데, 이 계단은 아마도 관광객을 위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성문 위에는 3층으로 지은 문루(門樓)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데 각층마다 붉은 회랑 기둥이 밖으로 나란히 드러나 보여 웅장함을 느끼게 했다. 기둥을 세어보니 정면으로 9주, 측면으로 5주가 나란히 서 있고, 지붕은 여러 층의 공포(拱包) 위에 서까래를 촘촘히 겹으로 뽑아내고 추녀의 곡선을 살려 기와를 덮었다. 오색으로 단청(丹靑)을 하였으나 누각 전체가 희뿌옇게 탈색이 되어 고도의 정취를 물씬 풍겨나게 했다.

 각층 칸칸에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중국 특유의 커다란 붉은 항아리등이 걸려있다. 마주보는 두 성루를 이어놓은 옹성의 양쪽 길(城路)은 폭이 15m나 되고, 두 길 사이의 거리가 120m나 되는데, 이것은 적이 성문을 부수고 진입할 때, 양쪽에서 활을 쏠 수 있는 유효 사거리가 60m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치루(雉樓:성벽에서 튀어나온 부분의 누)와 치루 사이의 거리도 120m마다 축조하였다고 한다.

 문루(門樓) 주위의 성로(城路)에는 그 옛날 전투에 사용했던 화포, 화차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성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총안(銃眼:활이나 총을 쏘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성 밖을 내려다보니 적이 성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파 놓은 깊은 해자(垓字)가 저만큼에서 물을 흘려보내며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은 해자 위로 많은 교량이 놓여 쉴 새 없이 차량들이 성을 드나들고 있다.

 숱한 왕조가 세워지고 멸망하였던 이곳에서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넋을 품고 그들의 피를 씻으며 묵묵히 서 있는 서안성, 그러나 지금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성벽 따라 아름다운 조명이 켜져, 서안의 밤을 지배하는 화려한 풍경이 되니, 무상한 세월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서안성(西安城)은 수나라 때인 582년에 처음 세워지고, 당나라 때 크게 확장 되었다. 당나라 때 지금의 ‘서안’을 ‘장안’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이 성을 ‘장안성’이라고 부른다. 수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 파손된 것을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1378년부터 8년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총 길이 13.7㎞이고, 높이는 12m이며, 폭은 15m나 되는 현존하는 중국의 성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성이다. 서안의 중심부를 동서로 길게 장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옛 성벽을 직접 밟아보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길이 넓고 공간이 넉넉하여 얼마든지 많은 군병과 화차, 화포가 서로 마주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을 한 바퀴 걸어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관광객을 위해 운행하는 전기 자동차를 타고 남문까지 왕복하기로 했다. 성 위를 덜커덩거리며 달리는 전기 자동차 좌우로 수십 층이 되는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깊숙이 난 도로엔 자동차들이 그 옛날 기마병처럼 달리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이다. 남문에 도착하여 성문 아래를 한 바퀴 돌아 올라왔는데 문의 구조는 동문과 비슷했다.

 성문은 사방 네 곳에 큰 문이 나 있는데, 그 당시에는 우리가 입장한 동문(東門)으로 주로 생필품과 공물(貢物)을 운반하였고, 서문(西門)은 무역로인 실크로드(Silk Road)의 출발점이어서 서방 상인들의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북문은 외국의 사절단들이 드나들었고, 이곳 남문은 황제만 출입하던 전용 문이었다. 특히 남문은 절대 권력자인 황제의 출입문이니 경계가 삼엄하였을 것이고 백성들은 접근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황제가 아니면서 남문을 통과한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인도에 가서 불경을 연구하고 17년 만에 많은 불교 경전과 불상, 부처님의 진신 사리 등을 가지고 돌아 온 현장 법사다. 그리고 근래에는 홍콩의 액션 배우 성룡과 한국의 여배우 김희선이 이 문을 통과하는 영광을 얻었다고 하니, 새삼 우리 한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본다.

 다시 동문으로 돌아오면서 성 안을 내려다본다. 길이 동서남북으로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있고 고가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곳을 수도로 정할 때 계획도시로 조성하였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다니는 북쪽 거리를 바라보니 멀리 성의 한가운데쯤에 사모 지붕을 한, 3층의 서안 종루(鐘樓)가 높은 축대 위에 우뚝 서 있고, 종루 아래로 지나가는 통로가 흐릿하게 보인다.

 

 

 

 

 

 

 성(城)을 내려와 저녁 식사를 한 뒤 회족(回族) 거리로 갔다. 다양한 먹을거리와 기념품들을 진열한 가게가 좌우로 빼곡히 들어서 있고, 밝게 불을 밝힌 상점마다 손님을 부르는 직원들의 높은 목소리와 동작이 마치 우리나라 재래시장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회족들의 ‘북원문 이슬람 시장’이다. 중국은 인구의 92%가 한족(漢族 )이고 8%가 소수민족이다. 회족 인구는 중국 전체에 900만 명이나 되고 서안에서만 6만여 명이라고 하니 55개의 소수민족 중에는 다수에 속한다고 한다.

 회족 거리 끝부분에 이르니 화려한 조명에 추녀마루를 추켜올린 우람한 누각이 밤하늘에 솟아 있었다. 서안의 고루(鼓樓)라고 했다. 고루의 북쪽 편에 ‘성문우천(聲聞于天 :북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라는 시경의 글귀를 적은 현판이 걸려 있고, 남쪽 편을 올려다보니 ‘문무성지(文武盛地:문무가 번성하는 땅)’이라는 현판 글귀가 보였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은 북을 달아놓고 울렸기에 저렇게 큰 고루를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올라가서 자세히 속을 볼 수 없으니 더욱 궁금증이 났다.

 

 

 

 

 

 

 

  이 고루 남동쪽 450m 떨어진 곳에 낮에 서안성 남문에서 보았던 종루가 있는데 종루와 고루 사이에는 서안 젊은이들의 만남의 광장으로 유명한 ‘종고루(鐘鼓樓) 광장’이 있다고 한다.

 서안의 종루와 고루는 14세기 명나라 때 장안성을 복원하면서 세웠는데 아침에 종을 울려서 모든 성문을 열게 했고, 저녁에는 고루의 북을 울려 모든 성문을 닫도록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종루는 성문을 열 때부터 낮 시각을 알리고, 고루는 성문을 닫을 때부터 밤 시각을 알리는 시계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곧, 저 높은 고루에서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밤하늘에 퍼지고 성문이 닫힐 듯하여 우리는 고루를 뒤로하고 시장을 빠져나와 성 밖에 있는 서안 군안왕조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서안의 야경을 보려고 커튼을 열었다. 창 밖에는, 마치 화려하고 장엄한 오페라 무대를 꾸며놓은 듯, 성벽과 누각과 깃발들이 조명에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황홀한 야경에 홀려 창가에 기대선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