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기>
한 경제릉(漢 景帝陵)
중국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짐을 챙겨 나오니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서인지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다. 오전에 한(漢)나라 경제릉(景帝陵)을 관람하고, 서안 공항에서 11시 45분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서안의 아침 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복잡하다. 자동차, 자전거, 오토바이들이 교차로에 빽빽이 모여 섰다가 신호를 받으면 파도처럼 밀려가고 밀려온다. 이곳은 대도시라도 큰 교차로가 아니면 신호등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횡단보도 양쪽에는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교통지도 봉사활동을 나온 젊은 남녀가 어깨띠를 두르고, 붉은 교통 깃발을 손에 들고, 몇 사람씩 무리지어 서성거리고 서 있을 뿐, 엄하게 통제하지도 않는다. 복잡한 시내 한복판을 지나올 때도 신호등이 드문드문 보였고, 차들은 다투어 끼어들고, 돌고, 건너갔다. 차를 타고 있으면 정말 아찔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엄격한 교통규칙에 따라 운전을 해야 하고, 대도시에서 아침마다 교통지옥을 겪으며 생활해 온 나는 교통안전에 대한 기본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은 모습이 의아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운전을 잘해서일까? 습관이 몸에 배어서 일까? 시끄럽기로 하면 둘째가 서러울 중국인들인데, 저 곡예운전자들이 실수라도 하여 옥신각신 다투고 있을 사고 현장이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 모두가 스스로 알아서 무질서 속에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서안 성벽을 지날 때, 성호(城壕) 좌우 숲 속에서 태극권으로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차창으로 즐비하게 들어왔다. 어느 가게 앞에서는 대여섯 명의 여직원들이 아침 햇살이 스치는 가로수 밑에서 홍보 율동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시내를 벗어난 우리 차는 도심과 다르게 표지판과 차선이 산뜻하게 정비된 고속도로를 타고 시원하게 달렸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로 착각할 것 같은 각종 표지판과 차선의 색깔이 눈에 익숙했다. 다만 한글 없는 표지판과 아무리 가도 휴게소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점이 다를 뿐이다. 노변에 드문드문 커다란 광고탑이 지나가고, 삼성 전자, LG 전자, 현대차, 기아차 광고가 우리를 더욱 반갑게 맞이한다. 멀리 조그마한 야산이 간혹 보이는데 그것은 모두 황릉이나 황후릉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
이윽고, 한(漢) 경제릉(景帝陵)에 도착하였다. 역시 황릉은 나직한 산(山)만 하고 나무와 잡초로 덮여있다. 계단을 올라서 묘의 분상을 저만큼 두고 오른쪽 지하 입구로 들어섰다.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멸하고, 다시 항우와 천하를 다투어 한(漢)나라를 세운 제1대 한 고조 유방으로부터 시작하여, 제6대 한(漢) 무제(武帝)에 이르기까지, 그들 황제의 초상을 음각한 하단에 사적을 약술한 화강암 대리석판이 6폭 병풍을 친 듯 벽면에 세워져있다.
제5대 황제인 한 경제는 108년, 우리의 고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우리 땅 일부를 점령하여 낭랑, 진번, 임둔, 현도의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던 한 무제의 아버지이다. <그 후 한사군은 지속되다가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에 이르러 완전히 섬멸된다.>
아버지인 문제는 외척 세력을 축출했고, 아들 경제는 드세었던 제후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여 내정을 안정시켰고, 봉건제도를 확립하여 한나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후세 사람들은, 제4대 문제(文帝)와 제5대 경제(景帝)의 태평치세(太平治世)를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부르며 오래도록 이 두 황제를 추앙하였다고 한다. 300년 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유비(劉備)는 바로 경제(景帝) 황제의 후예이다.
이 지하 박물관은 한(漢) 경제릉(景帝陵)의 전면 동쪽 지역인 일부 외곽 갱만 50년 동안 발굴 작업을 한 후, 2006년 지하 박물관으로 조성하여 유물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능의 중심부와 그 둘레에 남은 세 지역은 아직 발굴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 황릉은 중국에서 발굴한 최초(最初)이자 최고(最古)의 능으로 그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한다.
박물관 입구에서 체크인 후 비닐 덧신을 신고 어둡고 긴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희미한 유도등을 따라 가는 통로는 발굴된 갱도(坑道) 위로 유리를 깔아서 발아래 갱 속을 살펴볼 수 있도록 설치해놓았다. 조명이 얼마나 어두운지 갱도 아래를 살펴보려면 한참 멈춰 서서 눈조리개를 활짝 열고 살펴야, 긴 갱도 속에 조밀하게 진열된 도용(陶俑)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에는 실물 크기의 도용들이었는데, 이곳의 도용(陶俑)들은 대부분 실물을 1/3로 축소시켜 제작하였다. 진시황 병마용들은 대부분 호위무사들이 갑주(甲冑)를 착용한 상태로 제작된데 반해, 태평성대를 누렸던 한(漢) 경제릉(景帝陵)의 도용은 서한(西漢) 제릉적(帝陵的) 제사(祭祀)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몸체만 만들고 그 위에 제복을 입힌 것으로 추정된다. 도열해 있었을 도용들은 2,000년의 긴 시간 동안 매장 당시에 입혔던 복장의 모습은 흙 속에 삭아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음경이 달린 남자 도용들과 가슴이 나온 여자 도용들이 알몸으로 갱 속에 무리지어 스러져 있다.
다음 갱 속을 자세히 내려다보니 네 마리의 흰 말이 끄는 우산 모양의 차양을 친 수레에 황제가 타고 제례에 참석하는 모습이 연상되었는데, 말과 수레바퀴가 흙더미 위에 스러진 채 모양을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습은 발굴 후 실물 크기로 복원하여 전시장에 별도로 진열해 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 갱 속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와 물 컵, 술잔, 물동이 등 다양한 생활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 편에는 도용을 채색하였던 물감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부장(副葬)한 모든 도용들은 실물의 색상으로 도색하였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땅 속에서 퇴색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 다른 곳은 가운데에 통로를 내고 좌우 갱 속을 볼 수 있게 유리벽으로 단면을 만들어, 긴 갱을 지나면서 양쪽 갱 속 모습을 살필 수 있게 꾸며놓았다. 왼쪽 갱은 제사 음식을 조리하는 모습을 재현한 듯한 조리 기구류, 식기류 등이 나열되어 있고, 오른쪽 갱은 돼지, 염소, 개, 소, 양, 등의 가축들의 도용을 크기에 따라 갱 속에 2단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았는데 어림잡아도 수천 마리는 될 듯 했다.
여러 개의 갱을 돌아보고 나오는 부분에 전시장이 있었다. 그림과 모형으로 재현한 능의 제사 모습, 부장품의 복원품, 부장품 근접 촬영 사진 등이 즐비하다. 마지막 전시장 한 쪽에는 홀로그램으로 꾸민 두 해설자가 한(漢) 경제(景帝) 능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개국 말로 참새처럼 조잘대며 쏟아내고 있었다.
이 능에서 지금까지 발굴한 갱은 모두 17곳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가장 큰 수인 9라고 한다. 그래서 무덤의 갱을 팔 때에도 9를 거듭한 최고의 수인 81만큼 조성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이 능을 중심으로 네 간방에 81갱을 파서 부장품을 매장했다고 볼 수 있으니 아직도 묻혀있을 유물을 생각하면 입을 다물 수 없다.
어제 보았던 진시황 병마 용갱보다 규모나 작품의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부장품의 양이나 내용면에서는 한나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놓아, 그 시대의 과학 기술, 의식주, 경제 활동, 교통 등의 문명과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역사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지하 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한(漢) 경제릉(景帝陵) 봉분(封墳) 가까이에 가서, 봉분을 우러러보면서 문화의 시대적 괴리에 대한 놀라움에 말을 잊고 발길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진시황이나 한 경제 황제나 황릉에 도용을 부장(副葬)한 것은 아마 그 시대의 황제에 대한 예우문화(禮遇文化)였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드니 오른쪽 멀리 야산이 보인다. 저 곳이 한 경제 황후릉이란다. 저 황후릉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의 장식품이 들어 있을까?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서안 공항으로 향했다. 이 공항은 규모가 너무 작아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가이드는 아마 5년 후가 되면 서안의 도시나 공항의 모습이 별천지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그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한다며 우리와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대한 항공 비행기에 오를 때, 스튜어디어스만 보고도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하며 모두 흐뭇한 마음으로 좌석에 앉았다. 탑승객들은 대부분 우리처럼 관광을 하고 돌아가는 한국 사람들이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하였고 인천 공항에도 정시에 착륙하였다. 귀국 수속을 마치고 각자의 케리어를 찾아 끌고 공항 찻집에 모여 앉았다. 4박 5일의 짧은 여정 속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이 뇌리에 스치는지 찻잔을 기우리며 모두가 멀뚱한 표정이다.
이번 여행을 위해 여행지를 물색하고, 여행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신속하게 회원에게 안내하고, 출입국 비자 관리와 현지 가이드 미팅까지 우리 팀의 팀장 역할을 솔선하여 맡은 사람이 명덕 거사 내외분이었다. 우리는 잊을 수 없는 명덕 거사 내외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4박 5일 동안 서로 보살피고 걱정하여 가족처럼 두터운 정을 쌓으며 한 사람도 사고 없이 건강하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자신에게 감사하는 박수를 보냈다.
대구, 안동, 용인으로 출발하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우리 여덟 사람은 다시 한번 이런 기회를 가질 것을 약속하면서 아쉬운 이별의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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