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견새 우는 마음
하얀 꽃부리 펼치려던 매화가 솔바람에 수줍어 향낭(香囊)을 감출 때면, 초목들은 다투어 가지 마디마디에 움을 내민다. 겨우내 보고 싶었던 이웃들의 모습, 싱그럽던 지난여름에 함께 살던 풀벌레, 날마다 가지에 찾아와 즐겁게 노래를 하던 정다운 새들. 시원한 바람과 소나기, 강렬했던 햇볕의 애무를 다시 그리워하며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봄기운은 초목에만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을 잠에서 깨우고 활력을 불어넣어 약동하게 하니 사람인들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따스한 햇살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화사한 봄꽃이 골골마다 형형색색 수를 놓아 벌, 나비들을 유혹하고, 산들바람이 꽃향기를 싣고 대문 앞에 찾아오면, 누군가 손을 잡고 봄맞이 나서고 싶은 것이 봄날의 심정이다. 이런 날 어쩌다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되면, 헤어진 옛사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친구가 몹시도 보고 싶어지고, 떨어져 사는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저 세상으로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특히 봄이면 예나지나 여인들의 마음은 까닭 없이 설레어 꽃처럼 예쁘게 꾸미면, 멋진 남성이 나비되어 찾아오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꽃단장하기에 바쁘다. 이런 애틋한 여인의 마음을 흔히 춘심(春心), 춘정(春情)이라 하여 시나 노래로 전해온다.
조선 중기 충청도 군수의 서녀(庶女)로 태어난 이옥봉(李玉峯)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에 뛰어났다. 자라서 자신의 신분이 서녀(庶女)임을 깨닫고서야 결혼을 포기하고 상경하여 서울의 사대부(士大夫)인 조원(趙瑗)을 사랑하여 그의 첩이 되었다. 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면서 아녀자로서 더 이상 시를 짓지 말 것을 요구하고, 옥봉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흔쾌히 약속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전들의 토색(討索)질로 소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하옥된 남편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산지기 아내의 사연을 듣고 시 한 수를 적어주었다.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洗面盆爲鏡)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 삼아 쓰옵니다. (梳頭水作油)
제가 직녀가 아니옵거늘 (妾身非織女)
낭군이 어찌 견우시리요? (郎豈是牽牛)
산지기 아내는 이 시를 들고 파주 목사(牧使)에게 갔고, 파주 목사는 이 시에 감복하여 산지기를 방면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옥봉은 결국 조원한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도 사랑하던 남편과 생이별을 하게 된 옥봉은 남편 조원을 잊을 수 없어 오매불망(寤寐不忘) 간절한 마음을 노래로 읊조린다.
온다고 약속하고 어찌 이리 늦을까 (有約郞何晩)
매화꽃은 어느덧 뜰 위에 지는데, (庭梅欲謝時)
홀연히 나뭇가지 위에 까치 우니 (忽聞枝上鵲)
헛되이 거울 앞에 앉아 화장하옵니다.(虛畵鏡中眉)
이 시는 한 장면의 영상을 보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문을 열고 홀로 앉아 매화꽃잎 지는 빈 뜰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의 쓸쓸한 모습이 눈앞에 자세히 보이는 듯하다. 조용한 화자(話者)의 거동 속에 흐르는 지순(至純)한 여인의 마음을 엿보고 있으면 잔잔한 연민의 정이 가슴 한편에 저미어온다.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기로 약속이나 한 듯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그 긴 겨울, 하루에도 몇 번씩 방문(房門)을 열고 내다보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매화꽃 피면 오려나……’
했는데 벌써 꽃잎 떨어지니 포기할 만도 하지만, 홀연히 들리는 까치소리에 다시 기다리는 마음을 다잡고 거울 앞에 앉아 남편 맞을 준비를 하는 옥봉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그녀의 한결같은 마음은 이 봄 저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는 두견화(杜鵑花)인양 자못 비장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노래라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재색(才色)이 뛰어나도 한 번 지조 높은 선비의 마음을 거스른 여인을 다시 받아줄 조원이 아니었다.
달이 가고 해가 지나도 옥봉의 가슴에 새긴 일편단심(一片丹心)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 꿈속이라도 그리운 님을 찾아 만나고 싶은 애절한 심정을 구구절절(句句節節) 다시 써내려간다.
요즈음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신지요. (近來安否問如何)
사창에 달이 뜨니 한만 서려요. (月到紗窓妾恨多)
꿈속에 오고 간 길 흔적이 난다면, (若使夢魂行有跡)
그대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었으리오. (門前石路半成沙)
기다림에 지친 옥봉은 몽혼(夢魂)으로 남편을 찾아 나선다. 그녀는 꿈속의 일을 가정(假定)하여 자기의 보고 싶은 감정을 더욱 새롭고 강도 높게 표현해낸다.
옥봉은 꿈속의 혼령이 되어서 보고 싶은 남편을 수도 없이 밤마다 몰래 찾아갔다. 만약에 꿈속에도 발자취가 생긴다면 아마도 문 앞의 돌길이 절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더 이상 강렬한 그리움의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얼마나 간결하고 운치 있는 간절한 표현인가? 날마다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 한이 되도록 깊어가는 데, 그녀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남편이 그저 야속하기만하다.
이처럼 애절한 이옥봉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읽고, 이 시대의 시인(詩人) 이가림은 그녀의 남편이 되어 '목마름'이라는 화답(和答)의 시(詩)를 보내 위로하고 있다.
목마름
그대가 밤마다
이곳 문전까지 왔다가 가는
그 엷은 발자국 소리를
내 어찌 모를 수 있으리
술 취하여
그대 무릎베개 삼아
잠들고 싶은 날
꿈길 어디메쯤
마주칠 수도 있으련만
너무 눈부신 달빛 만 리에 내려 쌓여
눈먼 그리움
저 혼자서 떠돌다가
돌아올 뿐
그동안
돌길은 반쯤이나 모래가 되고
또 작은 모래가 되어
흔적조차 사라져
이젠 내 간절한 목마름
땅에 묻고
다시 목마름에 싹 돋아
꽃필 날 기다려야 하리.
-이가림 시집 <순간의 거울>에서-
조선 선조 때, 우리나라 최고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이옥봉에 대한 안타까운 기록을 볼 수 있다.
“조선 인조 때 조원의 아들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 사신을 갔는데 명의 대신이 그에게 조원을 아느냐 물었고 당연히 안다고 하고 자신의 아버지라고 답하자, 옥봉의 시집을 내밀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40여 년 전, 중국 동해안에 온 몸을 종이로 수십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그 노끈을 풀고 종이를 벗겨보니 그 안에는 가득 적혀진 시와 함께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그 시가 하나같이 수려하여 명(明)나라 조정에서 시집(詩
集)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 시대의 버림받은 모든 여성의 순수한 사랑을 대변하듯, 애틋한 마음을 많은 시에 담아냈던 옥봉은 아름다운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비련의 노래 속에 생을 묻고 만다.
이 봄, 저 산 가득히 핀 두견화(杜鵑花)는 감추었던 못다 한 사랑을 토해내듯 붉게 타오르고, 밤낮으로 서럽게 우는 저 두견새는 내 마음 몰라주는 그대에게 가슴 저미는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견새 우는 소리에 일지춘심(一枝春心)은 깊어만 간다. (2013.4)
'주비글마당 > 흙살깊은골짜기<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독(聲讀)의 맛 (0) | 2014.02.16 |
---|---|
아라한의 숲을 거닐다 (0) | 2014.02.16 |
<중국여행> 중원 단상 (0) | 2011.06.15 |
<중국여행> 한 경제릉 (0) | 2011.06.15 |
<중국여행> 서안성 (0) | 2011.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