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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의 숲을 거닐다

주비세상 2014. 2. 16. 13:44

아라한의 숲을 거닐다

 

 속진(俗塵)에 저려진 몸을 청결하게 하는 방법으로 산사를 찾는 것은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다. 번다한 세상사에 얽힌 인연을 잠시 접어놓고, 청풍명월 그윽한 숲속에서 무심히 세월에 몸을 실으면 마음은 청정수에 씻은 듯 맑아지고 몸은 구름처럼 가벼워지니 이보다 좋은 보약이 없다.

 나에게는 해마다 여름과 겨울철이 되면 시간을 내서 함께 산사를 찾아가는 10여 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두 사람의 도반(道伴)이 있다. 용인에 사는 명덕 거사와 대전에 사는 박 거사이다.

 오래도록 지기(知己)로 지낸 명덕 거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우연히 한국불교대학에 함께 입문하게 되어 나를 지금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한 신심(信心) 깊고 수행근기가 대단한 법우(法友)로 우리 세 사람의 선도자이다.

 박 거사는 퇴직 전까지 명덕 거사와 동직 동료로 친분을 맺은 사이였다. 한 스님의 새로운 사찰 건립 발원에 동참할 정도로 불심이 깊은 가정을 꾸려오면서 스스로 수행 공덕을 쌓으려는 의지가 굳은 열렬한 도반이다.

 우리 세 사람은 불법을 인연으로 해마다 두어 차례 시간을 내서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6박 7일 동안, 전국의 산 좋고 물 맑은 사찰을 찾아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해왔다. 대승사, 축서사, 부석사, 해인사 원당암, 보문사, 수도암, 용수사, 치악산 상원사, 오대산 적멸보궁, 부안의 월명암 등 유명 사찰을 찾아 다녔는데 가장 자주 찾은 절이 대승사(大乘寺)이다.

 신라 진평왕 때, 사면에 부처를 조각한 바위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산기슭에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있는 문경 대승사는 우리 세 사람에게 매우 친숙한 절이다. 10여 년 전부터 찾아왔으니 경내 구석구석 낯선 곳이 없다. 다만, 주지 스님이 혜담 스님에서 탄공 스님으로 바뀌면서 대대적인 복원 불사(佛事)를 하여 새로운 당우가 들어설 때만 낯설 뿐이다.

 아름답고 정겨운 이 절은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우리를 반겨준다. 일주문을 덮고 있는 울창한 전나무숲의 잔잔한 휘파람 소리와 백련당(白蓮堂) 입구 보리수나무 아래 소복하게 핀 노란 원추리꽃들의 환한 미소가 돌아온 주인을 반기듯 노래에 맞춰 한들거리며 춤을 춘다.

 한국불교가 세계에 알려지면서 사찰문화를 체험하려는 국내외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현재 전국 117곳의 절에서 템플스테이(templestay)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발맞춰 대승사도 현대식 내부 시설을 갖춘 전통 당우를 짓고 예불, 참선, 도자기 체험, 수제차 덖기, 108배, 산행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절을 찾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나 우리가 예약할 때는 방사(房舍)가 부족하여 지하방이라도 감사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 주지 스님께서 이 장마에 눅눅한 지하방보다 주차장 옆 황토방이 낫다고 하시며 배려를 해주셨다.

 다음날 새벽 세 시, 범종 소리가 사불산(四佛山) 기슭에 장엄하게 울려 퍼질 때 어설프게 잠에서 깬 나는 홀로 새벽 예불을 위해 대웅전으로 향했다. 가족 단위로 온 몇 팀이 법사의 지도를 받으며 신중단(神衆壇) 쪽에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리고 있었다.

 지난겨울 이후, 새벽 예불을 올리려고 부처님을 뵙는 것은 처음이다.

 ‘세사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잠도 제대로 깨지 않은 채, 부처님을 바라보고 무슨 생각들을 할까?’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저 무심(無心)하다. 부처님은 이런 무심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말없이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심히 칠정례(七頂禮)를 올리고, 무심히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예불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무심히 좌복(坐服)에 앉아 여명을 맞는다.

 좌선(坐禪)할 곳을 생각해 보았다. 백련당에는 재가불자들 10여명이 미리 결재(結制)에 들어가 있으니 중간에 끼어들 수 없고, 대웅전에는 49재의 막재 준비에 분주하여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대승선원(大乘禪院) 뒤쪽 높은 곳에 산신각과 나란히 자리 잡은 응진전(應眞殿)으로 발길을 옮겼다.

 응진전은 대승사 전각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응진전 앞에 서면 우측 발아래 대승선원, 그 옆에 대웅전이 있고, 좌측 발아래 극락전과 명부전이 계단을 사이에 두고 있다. 건너편엔 총지암이 숲에 가려져 어렴풋이 보인다.

 이곳 응진전에는 오백 나한(羅漢)들을 모셔놓았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이라고도 한다. 소승불교에서 성자(聖者)의 계급 단계를 성문사과(聲聞四果), 즉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로 나누는데 그 중 가장 윗자리 단계인 아라한과에 이른 부처님 제자들로, 온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공양을 받을만한 성인(聖人)들이다. 주련(柱聯)에 행서로 쓴 깨달음으로 가는 선시(禪詩)가 걸려있다.

觀音竹繞菩提路(관음죽요보리로)

관음죽이 보리로를 둘러싸니

先超苦海有慈航(선초고해유자항)

고해를 먼저 건넘에는 자비의 배가 있었네.

羅漢松圍般若臺(나한송위반야당)

나한송이 반야대를 에워싸니

立絶俗塵憑慧劍(입절속진빙해검)

속진을 확고히 끊음에는 지혜의 칼에 의지했네.

 고해(苦海)를 먼저 건너 깨달음에 이른 보살은 자비의 마음 없이는 불가능했고, 세속의 번뇌를 끊고 반야에 든 아라한은 날카로운 지혜를 쓰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는 의미인 듯하다.

 조용히 두 손으로 옆문을 밀고 나한님들 앞에 섰다. 각기 다양한 표정으로 삼면 벽을 촘촘히 채우고 앉아계시던 오백 나한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환영의 눈길을 보내신다. 두렵고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 삼배를 올린 뒤 좌복을 돋우고 조용히 앉아 아라한의 숲을 거닌다.

 오후부터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사나운 바람이 짙푸른 사불산 숲을 흔들어댔고, 굵은 빗방울은 마당에 진열된 옹기 위를 난타질했다. 매번 도반들의 울력으로 수련기간을 버티어왔는데 이틀 밤 동안 산사의 빈 방을 홀로 지키니 채워지지 않은 불안으로 마음은 허전한데, 창밖의 비바람 소리까지 도반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더욱 간절하게 흔들어놓는다.

 이번 수련계획을 4박 5일로 잡았는데 박 거사는 가사에 바빠 3일째 되는 날 합류한다는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명덕 거사와 함께 첫날 대승사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명덕 거사가 급전(急電)을 받고 귀가하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다음날 오후, 명덕 거사가 먼저 돌아왔고 박 거사도 뒤따라 합류했다. 우리는 서로 야단스럽게 고담대소(高談大笑)로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미소로 반기는 마음속은 내세(來世)의 벗을 미리 만난 희열로 가슴 벅차 있었다. 더구나 종무소(宗務所)에서 이산가족을 만난 듯 청안(靑眼)으로 반겨주시는 탄공(呑空) 스님의 해맑은 미소는 부처님의 품에 안긴 행복을 흠뻑 느끼게 해주었다.

 곧 응진전으로 가서 시정표대로 하루 열 시간씩 좌선에 들어갔다.

 불교에서는 사찰에 스님들이 공부하는 선원이 없으면 절이라고 여기지 않을 만큼 선원을 중시한다. 보물 금동보살좌상을 선원의 주존불(主尊佛)로 봉안하고 있는 대승선원은 40여 명의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H자형, 정면 8칸, 팔작지붕으로 1960년경에 건축되었다.

처음 명덕 거사의 안내로 대승사를 찾았을 때, 대웅전과 나란히 위치한 대승선원을 보고 한동안 넋을 잃은 적이 있다.

 ‘선원이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푸른 하늘과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날아갈 듯 솟아오른 흑진주처럼 빛나는 용마루와 추녀마루의 곡선이 비상을 절제하며 다소곳이 앉아있는 고품위의 자태, 그 아름다움에 나는 두근거리는 내 마음속의 설렘을 오래도록 떨칠 수가 없었다.

 범상치 않은 지기(地氣)와 선기(禪氣)가 압도하는 저 선원에 들어가 앉으면 저절로 화두(話頭)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할 것 같고, 힘들이지 않고 성불(成佛)에 이를 것만 같았다.

 기라성 같은 선승(禪僧)들이 이 절에서 수행을 했고, 또 해마다 수행승들이 모여들어 용맹정진하며 선기(禪氣)를 뿜어내서일까? 혜담 스님은 주지로 계시던 어느 날 저녁, 대승사 경내가 대낮처럼 밝게 30여 분 동안 방광(放光)하여 스님과 신도들이 밖으로 나와 이 경이로운 현상에 모두 합장 예배를 올린 적이 있다고 하셨다.

 이번 수련기간 동안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산신각(山神閣) 계단 아래 비에 젖은 강아지풀이 소복하게 잔디와 함께 고운 풀빛을 발하며 융단처럼 깔려있다. 그 한복판에는 잎 지고 길게 솟아오른 한 줄기 상사화 꽃대가 불그레한 꽃망울들을 머리에 달고 아침마다 한 송이씩 피우며 눈물어린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포행(布行) 시간 때마다 천천히 산신각 계단을 따라 해우소(解憂所) 쪽을 돌아오면 앉아있었던 굳은 몸이 풀리고 싱그러운 숲 내음을 맡을 수 있어서 좋다. 굵은 빗방울이 길을 막으면 처마 아래에 서서 낙숫물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전당(殿堂)을 바라본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능선을 막고 있는 전나무 숲은 빗속에 숙연하고, 즐비한 당우의 기와지붕들은 비에 젖어 더욱 검게 반질거린다. 누군가 오지 않을까? 기다려지는 마음이 들 때쯤, 대웅전 영가단(靈駕壇)에서 재(齋)를 올리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영롱하게 산사에 울려 퍼진다.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옛적 영산(靈山)에서 여래의 부촉을 받으시고

威振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강산에 위엄을 펴며 중생을 제도하시네.

萬里白雲靑嶂裡(만리백운청장리)

흰 구름 만 리에 뻗은 깊은 산속에서

雲車鶴駕任閒情(운차학가임한정)

학이 끄는 구름수레를 타고 한가한 마음 누리시네.

 

 산신각 주련의 시를 음미하니 어느덧 신선(神仙)이 된 듯 초연한 마음이 되어 다시 아라한 숲의 문을 열고 좌선에 들어갔다.

 예정된 수련 시간이 꿈결같이 지나갔다. 벌써 마지막 시간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선기를 가득히 모아주신 오백 나한님들께 깊은 고마움의 예배를 올렸다. 응진전 돌계단을 내려서서 다시 한 번 거룩하신 아라한 성자들을 우러러 보았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이 의문에 저분들은 무슨 답을 얻었을까?  오직 모를 뿐이다.

 청련당(靑蓮堂)에서 주지 스님을 뵙고 하직 인사를 드렸다.

 “금방 와서 벌써 갈려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자주 와요.”

못내 서운해 하시며 대승요에서 구운 도자기 세트와 손수 엮으신 ‘조주어록’을 선물로 주셨다. (20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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