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비글마당/흙살깊은골짜기<산문>

성독(聲讀)의 맛

주비세상 2014. 2. 16. 13:46

 

성독(聲讀)의 맛

 

 지금 생각하니, 학창시절에 간단하게 책을 소개한 글을 읽고, 내가 그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남의 대화에 한몫 끼어들어 아는 체하던 때가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남에게 유식한 체하려고 수필이나 신문 칼럼에 인용된 한문 글귀를 메모해두었다가 그 출전을 확인하려고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소학, 명심보감, 고문진보 등을 뒤적거리며 적고 외우며 그 해석을 읽고 전부를 통독한 듯 기뻐하였으니 말이다. 초등학생 수준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내용이 담긴 명심보감도 읽지 않았고,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大學)의 의미도 모르고 지냈으니 너무도 한심하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까지 자주 들어왔고 모두들 많이 인용하는 글귀가 있는 책을 찾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몽선습부터 추구, 명심보감, 격몽요결에 이어 중용, 대학, 논어를 시간이 나는 대로 심심풀이 삼아 주석서를 읽어보았다. 구구절절 감동적인 내용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읽고 난 후 한 구절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 감동적인 성현의 말씀들을 한 마디도 생활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없었다.

 옛사람들은 이 어렵고 많은 글귀를 어떻게 익혀서 생활에 능숙하게 활용하였는지 새삼 그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하려고 욕심내던 학창시절이 그리워진다. 그 시절에 비하면 시험에 대한 부담도 없고 남은 것은 시간뿐인 지금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러나 이젠 기억력 저하로 읽던 책을 덮기만 하면 읽은 내용을 까맣게 잊으니 공부에는 시기가 있음을 절감한다. 이런 형편인데도 한두 번 스쳐 읽고 그 글귀를 인용하려 했으니 얼마나 건방진 일인가? 주자(朱子) 십회훈(十悔訓)에 소불근학 노후회(少不勤學 老後悔)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였을까?

 서당식 암기학습법은 지금 나에게는 불가능하고, 그대로 덮고 지내자니 내 무지와 텅 빈 시간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침, 달서복지관 한문동아리가 생겨 명심보감을 다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강사 선생님은

 “한문공부는 그저 입에서 줄줄 나오도록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시면서 아침저녁으로 배운 것을 큰 소리로 성독(聲讀)하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강의하실 때도 두 시간 중 한 시간은 책읽기를 하셨다. 선생님은 낭랑하고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구성지게 책을 읽으셔서 듣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고, 회원들은 다투어 성독 학습에 관심을 갖고 따라 읽었다.

 나는 이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강의 시간마다 녹취를 하여 원문과 소리 파일을 블로그에 올려놓고 자주 들을 수 있게 준비하였다. 회원들에게도 블로그 주소를 안내해드렸다. 그리고 외우려는 생각 없이 아침저녁 양치질하는 습관처럼 명심보감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몇 번씩 무작정 읽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옥같은 성현의 글귀가 온몸에 젖어들어 참 삶의 이정표를 확립하는 기틀을 마련해 주는가 하면, 안면 근육 운동도 되고, 폐활량 운동도 되고, 발음 훈련도 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 블로그에 들어가서 듣고, 산책을 하면서 MP3로도 듣고, 아침저녁 책을 보고도 읽으며 습관이 되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어떤 때는 귀에 익은 구절이 이어지고 그 지혜로운 의미에 감동이 되어 저절로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리면서 묘한 희열에 빠지기도 한다.

 추사(秋史)는 인생삼락을 일독(一讀:책 읽고 배우는 일), 이색(二色:사랑하는 이와 고락을 같이함), 삼주(三酒:벗과 풍류를 즐김)라고 하면서 독서를 그 으뜸으로 꼽았다.

 나이 들어 직장에서도 물러나고, 이순(耳順)을 넘길 즈음이면 혼자 사유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된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생활프로그램을 짜서 노년의 시간을 보람 있고 즐겁게 보내겠지만,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장 경제적이면서 참된 희열을 맛볼 수 있는 일은 명상(冥想) 다음으로 고전(古典)을 성독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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