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연가
황해도 황주(黃州)에 유지(柳枝)라는 어린 기생이 있었다. 그녀는 선비의 딸인데, 가문이 몰락해 기녀가 되었다. 용모도 귀엽고 마음씨 또한 고와 뭇 사내의 가슴을 태웠으나, 본인은 정작 세상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절개를 굳게 지켰다.
율곡이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평소 율곡의 인품과 학덕을 사모하던 유지는 황주에서 해주(海州)로 넘어와 율곡의 수청을 들었다. 당시 관습에 비추었을 때 중년의 남성이 20대의 기녀(妓女)를 가까이 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한 어머니 가르침에 몸가짐을 바로 한 율곡은 안방에 들어 갈 때도 의관을 정제한 뒤 들어갔고, 또한 몸도 허약하여, 유지의 살수청은 요구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도 동기(童妓)인 유지의 머리를 얹어주지 않자, 시정잡배들은 너도나도 유지의 머리를 올려 주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유혹이 거세어지자 유지는 율곡에게 간청을 하였다. 그리하여 풍부한 학식과 고매한 인품을 소지한 율곡에게 성인지례(成人之禮)를 받았다. 율곡은 차마 몸은 범하지 못하고 축하하는 시를 지어주었다.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숙여 (弱質羞低首)
추파를 던져도 대답이 없네 (秋波不肯回)
마음은 부질없이 설례이건만 (空聞波濤曲)
운우의 정은 풀지 못 하였오 (未夢雲雨臺)
너는 자라면 이름을 떨칠 것이나 (爾長名應擅)
나는 이미 늙음 길에 들어섰네 (吾衰閤已開)
미인에게는 임자가 따로 없으니 (國香無定主)
영락없이 가엾겠구나 (零落可憐哉)
2년간의 관찰사 임기가 끝나자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해주에 있는 석담(石潭)으로 가 후학도 양성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도 저술하였다. 비록 어린 유지에게 깊은 정은 주지 않았지만, 유지는 율곡만을 생각하며 굳게 지조를 지켰다. 유수 같은 세월은 무정히도 흘러 유지가 24세가 되던 해, 율곡은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해주에 오게 되었다. 그날 밤, 유지가 율곡의 처소를 찾아왔다. 이때 율곡은 다음과 같이 도학자의 심정을 읊었다.
“문을 닫으면 인(仁)을 상할 것이요, 동침을 한다면 의(義)를 해칠 것이다”
(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
어떻게 했을까?
결국 율곡은 문을 열고 아리따운 유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가운데 병풍을 치고 두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문을 열고 유지를 맞아들임으로써 인을 실천했고, 유지와 몸을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써 의를 지켰다. 현명한 선비의 풍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 그 간절한 마음을 감출 수 있겠는가? 율곡은 시를 지어 유지를 향한 마음을 대신했다.
타고 난 자태 선녀인 양 침착하고 고상하여 (天姿綽約一仙娥)
서로 알기 십년에 마음 움직임도 많았네. (十載相知意態多)
내 본시 목석같은 사내는 아니나 (不是吳兒腸木石)
병으로 쇠약하여 화려한 꾸밈을 사양했을 뿐이네. (只緣衰病謝芬華)
너무도 오랫동안 그리던 낭군을 하룻밤에 보내는 유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유지는 율곡의 도의에 감복하고 진심으로 따랐다. 훗날 석담으로 다시 오겠다고 한 율곡은 이조, 형조,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49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해주에서 부음을 들은 유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두문불출한 채 3년 상을 치렀다. 상을 치룬 유지는 머리를 깎고 구월산에 들어가 율곡의 극락왕생을 빌다가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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