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향기따라
일 년을 벼르고 별러 만난 붕우회원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을 가로막은 듯, 아직도 홍안(紅顔)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이 들수록 젊은 시절이 그리워지고 헤어진 옛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매년 한 두 번씩 만나는 우리 모임은 20대 때 안동에서 좋은 인연으로 만나, 용인, 대구, 안동에 흩어져 사는 죽마고우로 지금껏 형제처럼 의지하며 우애를 유지해오고 있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유성요금소 앞에는 주차할 곳이 없어 잠시 눈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계룡산 갑사(甲寺)로 향했다. 매화 피고 새움 돋는 춘삼월인데도 춥고 눈비 오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어 걱정했었는데 오늘은 쾌청하고 포근하여 하늘도 우리의 만남을 기뻐하는 듯했다.
백제시대의 사찰인 갑사는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부처님의 사리를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는데, 이때 다문천왕이 계룡산에 천진보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셨다고 한다. 그 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천진보탑에서 상서로운 빛이 방광(放光)하자 예배하고 이곳에 갑사를 창건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여 화엄10대 사찰의 하나로 크게 번창하였던 절이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경내 당우에 이르기까지 하늘을 가리는 우람한 고목들이 빼곡하고, 묵은 낙엽더미가 발길에 채여 지난 가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었을 화려한 단풍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봄 경치는 마곡사 가을 풍경은 갑사-’라는 말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맞배지붕으로 지은 웅장한 대웅전을 올려다보니 여섯 개의 둥근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淨極光通達 청정이 극에 이르면 빛에 통달하니,
寂照含虛空 온 허공을 머금고 고요하게 비치네.
却來觀世間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
猶如夢中事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
雖見諸根動 비록 육근(눈,귀,코,혀,몸,뜻)이 움직임을 보게 될지라도
要以一機抽 조종(환술을 의미)이 한번 있어야 되는 것이니.
이 글은 능엄경에 나오는 게송으로 문수사리보살이 마등가의 환술에 빠져 음처에 출입한 아난존자를 꾸짖는 내용이라 한다.
부처님께 경배(敬拜)를 올린 후, 포근한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는 양지바른 길로 내려오면서, 인간 사후(死後)의 영적(靈的)인 세상을 화제로 삼으며 잠시나마 세상시름을 놓아보았다.
갑사를 출발하여 40여 분을 달려 공주(公州) 금강 남쪽 강가에 있는 공산성(公山城)에 도착하였다. 수많은 옛 관리들의 공덕비가 성을 오르는 연도(沿道)에 도열(堵列)해있는 길 따라 쉬엄쉬엄 걸으니, 금서루(錦西樓)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고, 좌우로 큰 돌로 쌓은 성벽이 산 능성 따라 뻗어있다. 노란 천에 검은색 백호 문양(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사신<동(청색)-청룡, 서(백색)-백호, 남(붉은색)-주작. 북(검은색)-현무>의 깃발을 세움)을 하고 테두리는 흰 천으로 거치문양(鋸齒文樣)을 한 백제 영지 번기(幡旗)가 줄지어 성벽 위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백제시대의 전장으로 시간여행을 온 듯 착각에 빠져버렸다. 성벽을 따라 걷는 길 양쪽에는 낙엽 진 잡목 숲이 이제 막 겨울눈을 터트리려고 불어오는 춘풍에 용을 쓰고 있었다.
북쪽으로 금강이 감돌아 흘러 천혜의 요새(要塞)로 자리 잡은 공산성은 너른 광장과 작은 골짜기들이 즐비하여 곳곳에 그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다. 동쪽에는 영동루, 서쪽에는 금서루, 남쪽에는 진남루, 북쪽에는 공북루 등 4개의 문이 있고, 백제 시대 왕궁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임류각, 조선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쌍수정, 조선 정유재란 때 명나라 세 장수의 업적을 기린 명국삼장비, 그리고 불교 사찰인 영은사도 보인다.
금서루에 올라 성벽 길 따라 시선을 옮겨가며 한 바퀴 성터를 둘러보다가 잠시 눈을 감아본다. 연병장을 꽉 매운 갑주(甲冑)차림의 군사들이 장군의 지휘에 따라 병장기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군졸들이 토해내는 함성이 산하를 감돌아 저 강물 위에 메아리치는 듯 들려온다. 눈을 뜨고 건너다보니 금강의 맑은 물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금강교와 백제대교가 북쪽 아래 나란히 그림처럼 내려다보이고, 강 건너에는 공주시가지가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22대 문주왕이 위례성에서 웅진성(공주)으로 천도하여 26대 성왕이 사비성(부여)으로 다시 천도하기 까지 약 64년 동안 세 왕조의 짧은 도읍지였던 백제의 두 번째 수도 공주, 백제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공산성(公山城), 그리고 수많은 유적들이 말없이 그 시대의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도 잔잔히 흐르는 금강과 함께 우리의 혼을 지키고 있다.
해가 서쪽 산으로 기울 때, 우리는 서둘러 이곳에서 백제를 통치했던 무령왕이 잠들어 계신 송산리로 향했다. 금잔디로 깔끔하게 정돈된 송산리고분군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능선 따라 이어져 있고, 그 옆으로 사람들이 오를 수 있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제25대 백제 무령왕(武寧王)은 재위 22년 동안 웅진에서 민생을 편안히 하고,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등 큰 업적을 이루어, 그의 아들인 성왕(聖王)이 백제의 중흥을 이루도록 한 왕이다. 무령왕은 최근 M방송사에서 드라마로 제작하여 방송한 ‘수백향’ 공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묘지석(墓誌石:무덤 주인을 적은 돌)을 발견하여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 무덤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고분군 아래쪽에 관람객을 위해 실제 무덤처럼 만들어 놓은 송산리고분군모형전시관으로 먼저 들어갔다. 송산리고분은 7호까지 있는데 그 중에서 5호, 6호, 7호(무령왕릉)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그리고 발굴 당시의 부장된 유물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진열해 놓았다. 무덤 안은 연꽃과 도형 문양을 정교하게 새긴 작은 벽돌을 가로, 세로로 쌓아올려 장방형의 벽을 만들었고, 천장도 같은 벽돌을 가지고 아취형으로 쌓아 마감해놓았다. 그리고 사방 벽면에 군데군데 복숭아 모양의 작은 감실에 횃불을 놓았던 자리가 있고, 중방(中方)이라고 써 놓은 무덤창문도 보였다. 특히 6호분은 무늬벽돌로 쌓은 네 벽면마다 사신도(四神圖-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그려 망자를 사방의 악귀로부터 수호하도록 해놓았다. 사자(死者)를 보내는 장례문화가 너무나 정성스러워 마치 예술작품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름답고 안정되어 아늑하게 느껴졌다.
1호부터 4호까지는 도굴되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하나 7호는 무령왕릉으로 확인되어 백제의 역사를 더듬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곳 고분은 모두 왕릉이 아닐까하는 추측도해 본다.
모형전시관을 나와 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작은 산봉우리를 겹쳐놓은 듯 능선 따라 금잔디로 싸여있는 고분들이 솔숲 속에 숨어있고, 무덤을 발굴할 때 출입하였던 작은 통로가 몇 군데 보이는데 지금은 안내판으로 막아놓았다.
이분들이 조금 전에 다녀온 공산성에서 국사를 논의하며 한 시대를 통치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백제의 왕과 신하와 병사들을 만나고 돌아온 듯 감개무량함을 느낀다.
국립공주박물관 뒤편으로 내려와 주차장 잔디에 앉아 소정 총무가 준비해온 인절미와 과일을 맛있게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인절미는 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대왕이 임(林)씨가 진상한 떡 맛에 반해 "절미(絶味)로다!"한 것이 유래가 되어 ‘인절미<林絶味>’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해박한 소정이 인절미의 고향인 공주에 오면서 미리 준비해온 듯싶다. 잠시 소담(笑談)을 나누다가 해가 서산으로 숨어들 무렵, 백제의 다음 도읍지인 부여로 핸들을 돌렸다.
땅거미가 지나고 어둠이 내리려할 때 우리는 백제 무왕이 왕비를 위해 만들었다는 우리나라 최초 인공정원연못인 궁남지(宮南池)에 도착했다. 백제 무왕은 우리에게 마를 캐는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전설로 잘 알려져 있다. 무왕은 효심도 깊어 어머니를 위해 이곳에 포룡정(抱龍亭)을 짓고 둘레에 나무와 연꽃을 심어 아름다운 왕실정원을 만들었는데 당시 일본 조경의 원조가 되었고, 지금은 부여 10경의 하나로 매년 연꽃축제를 열고 있다고 한다.
일만 평이나 되는 넓고 반듯반듯한 크고 작은 연못에 사방으로 길이 나있고, 연못 안 정자로 가는 단청한 나무다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아련히 놓여있다. 황혼의 맑은 물에 비친 실버들가지가 봄바람에 오락가락 그림자 춤을 추는데, 저 물 위에 싱그러운 연잎 가득하고 홍련, 백련 송이송이 피어오른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연못에서 뱃노래 소리 들리고, 연꽃 사이로 용포(龍袍)를 입은 왕과 화려한 옷차림의 왕비가, 황금 일산(日傘)을 들고 따르는 환관들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한가로이 걷는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한동안 백제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궁남지의 절경에 빠져있는 동안 어둠이 덮이고 조명등이 밝혀졌다. 명덕 회장님은 숙소를 정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숙소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 우리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찾았다. 백제의 세 번째 왕도(王都), 사비(泗沘)의 중심지인 부소산은 동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고, 남쪽은 산세가 완만하여 부여(扶餘) 시가지를 이루고, 북쪽은 가파른 절벽이 백마강과 맞닿아 있다.
따스한 햇살이 성 안의 우거진 붉은 소나무기둥 사이로 빛줄기 되어 스며들고, 묵은 낙엽의 그윽한 내음과 상큼한 솔 향이 어우러져 기분을 더욱 맑게 해주었다. 1,300여 년 전의 공해 없는 향기를 마시며, 저마다 감동적인 백제의 흥망에 대한 역사를 한 자락씩 펼쳐 보이자, 어느덧 우리는 군창지와 반월루를 지나 부소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사자루에 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산과 평야와 강이 어우러져 산수의 극치를 이루는 절경으로 남쪽 편에 사자루라는 현액이 걸려있고 북쪽 편에는 백마장강(白馬長江)이라고 쓴 글씨가 마치 백마강 물결이 흘러가는 듯 굽이치고 있다.
그 아래편에, 백마강물을 내려다보듯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서있는 바위 절벽 낙화암.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망국의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렸던 백제의 여인들. 백제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숭고한 넋이 어린 낙화암. 아! 꽃잎처럼 떨어졌을 아름다운 여인들의 절개. 인류 역사 속에서 수천 명의 꽃다운 여인들이 이처럼 집단 순국한 사건이 또 다시 있으랴? 이 시대 사람들도 그녀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낙화암 정상 바위 위에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육각정을 세웠다고 한다. 저 아름다운 자연 속에 감춰진 쓰라린 역사의 흔적을 되씹으며 고란사(皐蘭寺)가 있는 백마강변으로 내려갔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백제시대에는 이곳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 임금은 이곳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고란약수를 매일 마시고 원기왕성하게 국사를 보았으니 세인들 입에서 고란약수를 마시면 3년은 젊어진다는 말이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 고란사 절 뒤편에 있는 고란정(皐蘭井) 바로 위 그늘진 바위틈에는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진녹색의 길쭉한 고란초 잎이 자라고 있었다. 종기가 났을 때나 소변을 잘 보지 못할 때 약초로 쓰인다는 이 고란초(皐蘭草)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고란사로 부른다고 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백마강 물결을 타고 구슬프게 흐르고, 잔잔한 강물 위에는 화려한 누각으로 꾸민 황포돛배가 유람객을 싣고 미끄러지듯 흐르고 있다. 몇 걸음 내려와 유람선에 올랐다. 배가 천천히 고란사 선착장을 출발하자 우리는 모두 뱃머리로 나와 시원한 강바람을 마시며 사방을 살핀다. 아마도 산과 숲, 바위와 강물이 어우러진 이 부소산의 빼어난 경관은 누가 봐도 감탄하는 천하의 절경이라 할 것이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면서 우리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우리의 정서에 짜임새 있게 어울리는 아름다움이다. 만약 어둠이 내리고 하늘에 달이 뜨고, 별과 함께 저 강물에 비친다면, 이백(李白)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저절로 시(詩) 한 수를 읊게 되리라!
그러나, 이런 비경(秘境)에 감탄하면서도 절벽 바위에 붉게 써놓은 낙화암이라는 글씨를 보는 순간, 저 높은 암벽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한 맺힌 백제 여인들의 넋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발아래 소리 없이 흐르는 이 강물은 어쩌면 그때 나라 잃은 백제백성들이 흘린 눈물이 강물 되어 아직까지 저렇게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가슴이 숙연해진다.
유람선은 어느덧 구드래나루터에 도착하였다. 부소산문 주차장을 가기 위해 구드래조각공원 앞길로 오다가 즐비한 식당들을 보자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여기서 점심을 먹고 논산으로 가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부여 사람들의 푸짐한 인심을 담은 맛깔스런 음식을 맛있게 먹은 회원들은 옛날 교과서에 은진 미륵이라고 소개된 관촉사로 향했다.
다섯 대의 회원 승용차가 대백제로로 달리자 황산벌 넓은 벌판이 펼쳐졌다. 그 옛날 신라와 백제가 이곳에서 국운을 건 일전을 벌렸던 곳이다. 차창 너머엔 계백의 오천 결사대가 불굴의 기백으로 토하는 함성이 하늘을 찌르며 말갈기를 휘날리는 듯하고, 이에 대항했던 화랑 관창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곳에는 지금도 그 기상을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려는 육군논산훈련소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관촉사(灌燭寺)에 도착했다. 미륵신앙의 성지인 관촉사는 옛날엔 은진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관촉동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 절은 고려 광종이 반야산의 큰 바위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난다는 소문을 듣고 당대 고승 혜명 스님에게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라고 명하여 38년 만에 높이 18미터나 되는 동양 최대의 거석불(巨石佛)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 미륵보살의 미간 백호에서 찬란한 빛이 송(宋)나라까지 이어져 그곳 지안 스님이 찾아와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
라고 한 뒤로 사찰 이름을 관촉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미륵보살은 보관(寶冠)을 쓴 머리 부분과 손 부분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조각 기법으로 보면 인체구조의 비대칭이 심하다. 아마도 이 보살을 만든 스님은 56억7천만년 후에 부처님이 되어 하생(下生)하시어 용화세계(龍華世界)를 펼치실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매우 고심한 듯하다. 산에서 솟은 듯 높은 키, 짧으나 탄탄하고 안정된 하체,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크게 뜨고 무명의 만중생을 살피려는 얼굴 표정, 오른손에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면서 깨달음으로 교화하려는 투박한 수인(手印), 얼굴의 두 배가 넘는 높은 보관과 넓은 보개석(寶蓋石)의 위엄. 세상을 압도하는 이 자태에 어찌 중생들의 마음이 끌리지 않고 굽어들지 않을 수 있으랴 !
우리는 유적 곳곳에 천년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미륵전 앞, 세 송이의 연꽃 문양을 새겨 만든 배례석(拜禮石)과 삼층석탑을 살피고, 범상치 않은 석등을 지나, 미륵보살 바로 아래에서 경건하게 경배를 올렸다.
그리고 이층으로 우람하게 지은 대광명전 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에도 예경을 올렸다. 회원들은 명부전(冥府殿)의 명부시왕((冥府十王)이 중생들의 태어난 태세(太歲)에 따라 담당하는 왕이 다르다는 말을 듣고, 사후 자기를 심판할 대왕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한 번 죄업을 짓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매화향기 산을 넘고 샛노란 산수유 손짓하는 봄날, 그립던 붕우형제와 함께 일박이일 동안 백제의 고도를 찾아보니 수려한 풍광에 젖고, 그윽한 백제의 향기에 취해서 천삼백 년 전의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백제 융성기의 찬란한 문화와 패망기의 서글픈 한을 새긴 유적들은 삶을 관조할 연륜인 우리들에게 더 깊은 성찰의 길을 걸으라는 교훈을 주었다.
열 두 명의 회원들은 역사와 교훈이 가득한 뜻 깊은 장소로 우리를 안내하고 편의를 제공하려고 노심초사한 명덕 회장님과 소정 총무님, 그리고 서로를 다정하게 대해준데 대한 감사를 드리며 아쉬운 백제의 고도를 떠났다.(2014.0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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