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지나 한계령을 넘으며
남녘 봄바람에 두견화 붉게 피는 춘삼월, 그리던 붕우회원들이 강원 횡성휴게소에서 만나 중춘아회(仲春雅會)를 펼치니, 돈후한 우정의 화풍(和風)은 새싹을 깨우고, 고담대소(高談大笑)의 정담은 춘광(春光)을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청정의 땅 봉평에서 문호 이효석(李孝石)의 문학을 되새기며 ‘메밀꽃 필 무렵’의 영상을 보고 전망대로 나왔다.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들판이 온통 메밀꽃이 핀 듯 하얗게 얼룩져 보였다.
‘여름이 되면 이 골짜기 가득 소금을 뿌린 듯 하얀 메밀꽃이 바람에 일렁이고 벌, 나비들이 모여 춤을 추겠지. 그 위에 은은한 달빛이 내리는 밤, 사랑하는 그대와 손을 잡고 밤새도록 걸으며 교화향(蕎花香:메밀꽃 향기)에 흠뻑 취하고 싶구나…….’
식당을 찾으니 메뉴가 온통 교맥(蕎麥:메밀) 요리로 가득하다. 메밀전병, 메밀부침에 메밀막걸리로 만남의 축배를 들고, 서로의 기호에 따라 메밀새싹비빔밥, 메밀묵사발, 메밀국수를 시켜 식사를 맛있게 했다.
다음 여정은 대관령삼양목장이다. 승용차로 가는 길이지만 이렇게 멀고, 깊고, 험한 비포장도로는 처음이다. 고요하고 포근한 봄볕 아래, 선도하는 명덕 회장님의 차가 뿜어내는 뽀얀 먼지는 뒤 따르는 회원들의 시야를 가렸다. 긴 연막을 헤치고 덜커덩거리며 목장을 찾으니 맥이 탁 풀리고 낮에 포식한 메밀 오찬이 벌써 소화가 다 되어버렸다.
매표를 하였다. 이 목장은 동양 최대 규모인 600여만 평의 초지에 900여 두의 각종 가축과 야생동물을 방목하고 있다. 관람객을 위해 능선 길 따라 길을 만들어 그린캠퍼스 25km를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고, 셔틀버스도 운행하고 있다.
오르는 곳곳마다 차창으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고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한 안내판이 보였다. 우리는 ‘바람의 언덕’에 내려 산책을 하였다. 바람에 모자를 날리며 오리털 파카를 다잡고 언덕 산책길을 걸었다.
우람한 풍력발전기 바람개비가 코앞에서 윙윙거리며 산꼭대기의 거센 바람을 받고 무섭게 돌고 있다. 산책길을 지나가는 바람개비의 그림자를 뛰어넘다가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 54기의 발전기가 산 능선 따라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광활한 목장이다. 강원도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은 초목이 메말라 삭막하고 짐승들은 우리 속에 있지만 4월이 되면 저 산등성이와 초지에 온갖 꽃들이 피어날 것이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깔린 초지에 수 백 마리의 젖소떼와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을 것이다. 가을이면 오색찬란한 단풍이 물들고, 겨울이면 첩첩이 겹쳐진 능선과 잘 다듬어진 초지에 새하얀 눈이 내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해발 1,400m인 ‘동해전망대’에 차를 멈추고 바람개비 발전기 뒤편에 설치해 놓은 전망대에 올랐다. 멀리 강릉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동해 바다 파도가 흐릿하게 보인다.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숨을 쉬며 호연정감(浩然情感)을 만끽해 본다. 온 세상이 가슴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온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듯하다.
‘대관령의 옛 정취를 느끼고 깊은 아름다움에 빠져보자.’
며 안내하는 명덕 회장님을 따라 우리는 대관령 옛길로 들어섰다.
굽이굽이 첩첩산중(疊疊山中)인데 눈길마다 처처절경(處處絶景)이니, 어머니를 두고 이 길을 넘으시던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심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踰大關嶺望親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在臨瀛)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獨去情)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回首北村時一望)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白雲飛下慕山靑)
해 질 녘에 강릉에서 양양 방향 중간쯤에 있는 바다 위의 절 휴휴암에 도착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께 예배를 올리고 바다를 보니 방금 동해의 푸른 파도를 헤치고 나투신 듯, 장대한 석조 지혜해수관음보살상이 감로법문을 설하시고 있다. 잠시 세속의 번뇌를 잊고 여여(如如)한 평상심을 챙겨본다.
“나무관세음보살……”
가로등이 켜지고 별들이 바닷물에 비칠 때, 낙산해수욕장의 호텔에 잠자리를 정했다. 우리는 해물찜으로 만찬을 즐겁게 마치고 숙소로 들어왔다.
우리는 한 방에 모여 소정 총무님이 알뜰히 준비해 온 와인과 다과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정담으로 세상 시름 잊은 채 즐거워했다. 전(全)여사의 감미로운 하모니카 연주에 흥을 참지 못하고 함께 노래도 불렀다. 안타깝게도 참석하지 못한 청담 내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 위로와 그리움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어느덧 상현달이 지고 삼경(三更)이 지났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주전골 오색약수를 지나 한계령 마루로 향했다.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니 골골마다 기암괴석들과 우람한 나무들이 줄지어 내려다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희끗희끗한 잔설(殘雪)이 숨어 보인다. 긴 암벽엔 흘러내리던 물이 얼어붙어 하얀 얼음기둥을 만들어 겨울 설악의 멋을 뽐내고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찻길 위에 찻길이 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로(道路) 아래에 도로가 보인다. 과연 태산준령(泰山峻嶺)이다.
똬리처럼 휘감아 오른 고갯마루에는 산을 등지고 앉은 멋스러운 휴게소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평소에 안개와 눈, 비, 바람이 잦아 차량 운행에 어려움이 많은 한계령이지만 오늘은 밝은 해가 포근하고 바람도 잔잔하다. 그러나 중국에서 불어온 황사가 심하여 산 아래 멀리까지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감상할 수 없었다.
따끈한 차 한 잔과 강원도 명물인 찰강냉이의 구수한 향을 씹으며 인제(麟蹄) 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마지막 여행지는 백담사이다. 타고 간 승용차는 주차장에 두고 백담사까지 운행되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십여 분 남짓 달리는 버스는 가파른 백담 계곡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절벽의 외길 잔도(棧道)를 달렸다. 차창 아래로 하얀 바윗돌이 깔린 긴 골짜기가 이어지고, 흰 돌 확(鑊)마다 옥빛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발원하여 이곳 백담사 앞을 흐르는 물은 골짜기 곳곳에 폭포와 작은 연못을 만들어 백담계곡(百潭溪谷)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진정 태고의 향기가 배어나는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백담사는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 선사께서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으신 신라 고찰이다. 최근에는 12대 대통령이 국민의 화살을 못 이겨 이 절에 은거한 적이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 되었다.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를 건너 극락보전의 아미타 부처님께 참배하고 나와 우측 화엄실 열린 방사를 보니 전 대통령 내외가 피신하여 한거하시던 흔적이 보였다.
‘저 좁고 누추한 방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 인생사 허무하다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을 느끼며 사경(寫經)하고 예불(禮佛)하였으리라.’
부처님 말씀이 은은하게 들리는 만해당과 만해기념관을 돌아보고 나오니 만해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 적힌 시비가 눈에 띈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幾人長在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一聲喝破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雪裏桃花片片飛 (설리도화편편비)
사나이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그 누가 오랫동안 객수에 젖었는가?
한 소리 큰 할에 삼천세계를 타파하니
눈 속에 도화가 조각조각 나는구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스님이 1917년 12월 3일 밤,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서 좌선(坐禪) 중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은 후 읊었다고 전한다.
무문관(無門關) 앞쪽으로 개울을 건널 때,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냇가의 작은 돌로 쌓은 수많은 돌탑들이 눈길을 끌었다. 개울의 돌을 다섯 개씩, 또는 열 개씩 올려 만든 작은 탑들이 개울 가득히 차지하고 있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쌓았는지는 몰라도 이 탑을 쌓는 순간은 부처님처럼 여여(如如)한 마음이 되었으리라. 회원들도 말없이 하나씩 탑을 쌓기 시작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산채비빔밥으로 아쉬운 이별의 오찬을 나누었다.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영동(嶺東)의 아름다운 풍경과 유익하고 의미 있는 여정을 기획하고 안내하신 명덕 회장님과 소정 총무님에게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더욱 돈독한 우의를 다짐하며 백담계곡을 떠났다.(2015.3. )
'주비글마당 > 흙살깊은골짜기<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주(宇宙)를 노닐던 진묵 (0) | 2015.03.05 |
---|---|
백제의 향기따라 (0) | 2014.03.30 |
송강 연가 (0) | 2014.02.16 |
율곡 연가 (0) | 2014.02.16 |
퇴계 연가 (0) | 2014.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