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草亭)의 봄
양지바른 담장 아래 소복이 돋은 연두색 풀잎들이 봄볕을 불러 조잘대고, 산골짜기 바위틈 얼음장 속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이슬 같은 물방울 소리가 들릴 때면, 매섭던 골바람도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겨울눈을 어루만지며 그네 타는 어치의 등에서 잠이 든다.
봄볕이 따사로워 집에서 가까운 월곡역사공원에 산책을 나섰다. 낙동서원 진덕문 왼쪽에 있는 초정(草亭)에 앉았다. 바로 앞에 반달처럼 생긴 연당(蓮塘)이, 지난 여름 이 연못 가득 연잎과 창포와 부들을 안고 싱그럽게 바람에 일렁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타다 남은 검불더미처럼 푸석하게 마른 연잎과 꺾인 부들을 물 바닥에 깔고 잠들어있다. 그 위에 봄볕이 내려앉는다.
연당 둘레로 오솔길이 나 있고, 연못 길가에는 잘 다듬어진 금잔디가, 내가 앉아있는 초정 둘레까지 넓게 퍼져 봄볕에 더욱 눈부시다. 잔디밭 군데군데 심어진 앙상한 이팝나무 가지 사이로 봄볕이 내려앉는다. 금잔디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큰 왕벚나무가 연못 둑길 양쪽으로 길게 심어져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 안에서 여자 아이 둘이 살금살금 벚나무기둥 뒤에 숨어 까치발로 가지에 앉은 산새를 사진에 담으려고 애를 쓴다. 벚나무 가지 사이로 숨어든 봄볕이 아이들 머리에 내려앉는다.
둑 아래 매화나무 네 그루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모두 하얀 매화지만 꽃빛이 유난히 맑은 두 그루가 있어 가까이 가 본다. 흰 꽃잎을 받히고 있는 다섯 장의 꽃받침이 연한 연두색이다. 그래서 그렇게 맑아 보였다. 사람들은 이 꽃을 청매화라고 부른다. 옆에 있는 두 그루는 붉은 듯, 흰 꽃이다. 흰 꽃잎 아래 연한 분홍 꽃받침이 받히고 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백매화라 부른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모두 흰 매화이지만 꽃받침의 배경에 따라 더욱 맑은 청매화와 더욱 화사한 백매화로 느껴진다. 저 아래 열락당 뜰 안에는 진홍빛 꽃잎에 붉은 꽃받침을 한 홍매화 한 그루가 붉은 빛을 뿜어낸다. 그 위에 봄볕이 내려앉고 꽃벌들이 매화 향에 취해 분주하게 쏘다닌다.
갓 입학한 남자 중학생 셋이 희망에 찬 얼굴로 학교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매화꽃 그늘을 지나간다. 그 옛날,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어렵게 진학했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1958년경, 나는 북후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면서 줄곧 우등상과 모범상을 받아 다른 학우들의 부러움을 받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전교어린이회장에 뽑혀 선생님들에게 더욱 인정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졸업식에서는 푸짐한 상과 졸업생을 대표하여 재학생의 꽃다발을 받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농촌 생활은 모두가 가난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한 학급에 반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진학하지 않는 학생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농사를 돕거나 도시의 공장에 취업을 하는 형편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당연히 내가 진학할 것으로 알고 원서를 제출하였고 중학교에서는 나를 신입생 대표로 뽑아 서약서를 낭독하도록 내정해 두었다. 그때는 졸업을 한 후 보름정도 쉬었다가 봄이 익어가는 4월 5일쯤 입학식을 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상 도저히 진학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부모님의 판단이었다. 형도 시키지 못하였는데 둘째는 더욱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 밖에 모르던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형과 함께,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거나 밭에서 거름을 내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는 범국민운동으로 해마다 봄이 되면 산에 나무를 심는 사방 부역을 했다. 동장님으로부터 4월 5일 나무를 심으러 나오라는 통지를 받고 아버지는 형과 나를 나무심기 부역에 가라고 하셨다. 그날이 중학교 입학식 날이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나의 진학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형과 함께 도시락을 꿴 삽과 괭이를 어깨에 메고 철길을 따라 도나리 뒷산으로 향해 걸어갔다. 물한동에서 등교하는 모교 후배들이 나를 보자 이상하다는 듯 되돌아본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중학교 입학식에 가는 친구와 마주쳤다.
“너 학교 안 가나? 어디 가는데?”
하며 말없이 걷는 나를, 발을 멈추고 한동안 뒤돌아보고 지나갔다. 형도 아무 말 없이 발을 더 빨리 옮기면서 내가 아이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했다. 산에 도착하였다. 면사무소 직원이 묘목을 배정해 주는 것을 형이 받아왔다. 심어야 할 묘목이 제법 많다. 형은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었다. 나도 형을 따라 구덩이를 파고 몇 구루 나무를 심었다. 왠지 온 몸의 힘이 빠지고 나른해졌다.
산기슭 풀숲에 주저앉아 괭이자루에 기댄 채 멍하니 먼 산을 건너다보았다. 산언덕 위에 따스한 햇살을 받고 타오르는 아지랑이가,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색깔 없는 연기로 피어오르는 듯, 나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는 동료들 사이를 걸어 나가 마이크 앞에서 서약서를 읽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중학교의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일까?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들이 공부를 가르치신다고 하던데…….
“점심 먹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형이 도시락을 가지고 옆에 와 앉았다. 형은 내 서운한 마음을 짐작하였는지 시키지도 않고 혼자 나무를 심고 있었던 것이다.
4월이 훌쩍 지나간 어느 날 아침, 새벽에 큰 마을에서 인분을 지고 오신 아버지께서 나를 불렀다. 학교에 가자는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검은 무명 한복 바지저고리로 갈아입고 아버지와 함께 중학교 교무실로 찾아갔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강달원 교장 선생님은 부끄러워하는 아버지에게 학비는 농사를 지어 가을에 납부해도 된다는 말을 하시면서 나를 교실로 안내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그날 새벽, 족형이신 교장 선생님에게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고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교장 선생님께서 아버지를 설득하신 덕분에 나는 중학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열심히 하여 반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학생회장으로서 각종 행사에 대표로도 자주 참석하였다.
중학교 3년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할 때 쯤, 또 다시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고민을 해야만 했다. 진기룡 담임 선생님께서 진학 상담을 하실 때 나는 가정형편으로 진학을 못한다는 말을 드렸다. 며칠 뒤 봄볕이 유난히 따뜻하던 일요일 오후,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 집으로 가정 방문을 오셨다. 아버지께서는 선생님을 사랑방으로 모시고 홍시와 막걸리를 대접하셨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취기가 뚜렷한 선생님은 밖으로 나와 마당에 있는 나를 보고 어깨를 툭툭 치시고는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하시고 가셨다.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소리 하노! 뭐, 우리 집 재산하고 바꾸지 않는 다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며 선생님과 이야기한 내용을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아마 선생님께서 나의 진학을 강조하시면서, 영국의 문호 섹스피어의 가치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말을 인용하신 것이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다. 물려받은 재산 없이 열 명의 식구들을 위해 피땀 흘려 호구지책을 찾으며 혼신의 힘을 기우리고 있는 아버지께 어린 자식 하나를 들어 전 재산을 들먹이다니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그 후, 어느 날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내미는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 없이 도장만 찍어 주시고 씁쓸한 듯 밖으로 나가버렸다. 학비를 감당하려니 앞일이 막막한 아버지의 심정을 나는 알고,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쨌든 선생님의 설득과 아버지의 이해로 나는 안동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삶의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 마음이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의 도움으로 나는 이제까지 살아왔다. 진정 나의 앞길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생의 목표를 정해 놓고 남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구한 적도 없다. 그저 냇물에 몸을 싣고 무심히 떠내려가는 복사꽃잎처럼 흘러가며 살아왔다. 마치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구경이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죽은 듯 앙상한 겨울철 나무나 땅 속에 뿌리를 묻고, 사라진 듯 숨어 있는 화초도 시절 인연을 만나면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각자의 본래 모습으로 주어진 생을 살다가 갈 뿐이다. 사람도 공원의 저 초목처럼 정해진 삶의 여정에 따라 현생에서 저마다 다른 꽃을 피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공(空)으로 풀어낸다. 공을 무진장(無盡藏)한 창조의 에너지라고 보고 있다. 그 에너지가 강가의 작은 모래알 하나에서 식물의 자람, 동물의 한살이, 바람의 움직임, 그리고 우주의 생성까지 창조해내고 일정한 질서에 따라 오랜 시간을 두고 성주괴공을 반복하도록 이끌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우주의 질서에 따라 살아왔고 또 살아간다. 내가 애써 만든 인(因)으로 새로운 연(緣)을 맞이하더라도 그 변화 역시 내가 지은 업(業)을 벗어나지 못한다. 광대한 우주질서의 범위를 초월할 수 없다. 하늘의 순리에 따라 순천(順天)의 삶을 사는 것이 각자가 꽃피울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
초정 앞에 가득한 저 초목들처럼 봄볕에 순응하며 아름답게 꽃 피울 향기를 품고 오늘도 사람들은 주어진 자기만의 길을 아스라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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