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무쟁처 월명암
(山上無諍處 月明庵)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의 남여치에 들어서니 하늘을 찌르는 삼나무들이 우리들을 맞이한다. 가파른 산 능선 길을 따라 한 시간 남짓 오르는 동안 산길 양쪽으로는 온통 낙엽 잡목이 어우러져 시야를 가로 막는다. 산을 넘으니 저만큼 앉아있는 암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드문드문 자리 잡은 소나무가 잡목 사이로 짙푸르게 보인다. 능가산 법왕봉 기슭에 자리 잡은 월명암은 해발 고도가 380m 밖에 되지 않지만 천여 미터의 보통 산을 오르는 만큼 힘이 들었다.
암자 입구에 우거진 소나무와 대나무 밭에는 산비탈 가득 꽃무릇(석산石蒜)이 푸른 잎을 내밀어 가을에 홀로 필 빨강 상사화(相思花)를 그리워하는 듯 애타게 목을 늘이고 있다.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법당 앞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내려다본다. 발아래 저 멀리 깔려있는 옥순(玉荀)같은 산봉우리들이 다투어 솟아 산태극(山太極)을 만들고, 그 사이로 감추어진 듯 흐르는 강물이 수태극(水太極)을 그려낸다. 뒤쪽은 높은 법왕봉이 솟아있고 좌우로 산줄기가 흘러내려 양팔로 암자를 포근히 안고 있다. 지관(地官)이 아니더라도 이 아늑한 느낌과 빠져드는 눈앞의 선경강산(仙境江山)을 보고 어찌 명당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법당 앞마당 왼쪽에 새로 지은 범종각이 목재의 향을 풍기며 아름드리 전나무와 단풍나무 아래 날아갈듯 자리 잡고 있다.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분별이 사라지고
귀로 듣는 소리 없으니 시비가 끊어지네.
분별과 시비를 훌훌 놓아 버리고
오직 마음 부처 찾아 스스로 돌아가네.
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聲絶是非
分別是非都放下
但看心佛自歸依
부설월명범종(浮雪月明梵鐘)에 새겨진 부설거사의 열반송(涅槃頌)이다. 이 글귀를 남기고 좌탈입망(坐脫立亡·앉은 채 열반) 하셨다고 한다.
인도의 유마 거사, 중국의 방 거사와 더불어 선풍(禪風)을 드날린 세계 3대 거사로 불리는 신라 신문왕 때의 부설 거사는 부인 묘화(妙華), 아들 등운(登雲), 딸 월명(月明)까지 일가족이 모두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월명은 이 암자에서 끝까지 수도하다가 육신등공(肉身登空)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대웅전 뒤쪽에는 사성선원(四聖禪院)이 있는데, 일 년에 두 번 안거(安居)철이 되면 십여 명의 스님들이 치열한 수행을 한다고 한다.
관음전 오른쪽에 진영(眞影)을 모신 조선 인조 때 진묵대사(震默大師)는 이곳에 오래 주석하시면서 독경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루는 젊은 스님이 마을에 재(齋)를 지내러 간다고 고(告)하였는데 큰스님은 문지방에 손을 올린 채 빙그레 웃으시며 책을 읽고 계시면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재를 마치고 돌아 온 스님이 다시 와보니 문지방에 손가락이 찍혀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아직도 미소를 지으며 독경삼매(讀經三昧)에 빠져계셨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동녘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 암자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아침마다 문만 열면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저 멀리 지평선의 어둠을 뚫고 이글거리는 태양이 천천히 얼굴을 내민다. 이 서광이 대웅전 부처님의 상호(相好)와 만나면 법당 안이 금빛 조명을 한 듯 환하다. 아! 잠자던 만물에게 힘을 찾아 주고 삶을 노래 부르게 하는 저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얼굴, 잠자던 만물을 일깨워 오늘 하루도 부푼 꿈을 안고 살아가라고 가림 없이 무진장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자비의 광명, 누가 저 치솟는 태양의 얼굴을 보고 절망과 좌절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끝없는 희망과 용기, 요동치는 열정만 있을 뿐이다.
잠시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보니 하얀 운무를 헤치고 수많은 군봉(群峰)들이 꽃망울처럼 솟아있다. 아침 공양을 하러 온 대중들이 모두 넋을 잃고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그저 저 지극한 아름다움에 언설(言說)로 표현할 말을 잊고 각자의 가슴에 감동을 새기고 있을 뿐이리라.
저녁 공양을 일찍 끝내고 대웅전 뒷길로 나있는 오솔길로 낙조대(落照臺)를 찾았다. 바닷물 속으로 떨어지는 지는 해가 칠선(七仙) 바다에 찬란하게 비치는 광경은 일출에 이어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관이다. 금가루와 은가루를 거울 위에 뿌린 듯 화려하게 반짝이는 넓은 바다 위에 닿을 듯 말 듯 내려온 진홍의 우람한 석양, 서녘 하늘 하얀 구름덩이 사이에서 쪼개지는 오색의 빛줄기, 멀찌감치 떠있는 초저녁 하늘의 구름이 석양을 받아 만들어내는 기이한 형상들, 모두가 바다를 거울삼아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꾸며낸다.
한동안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바다와 석양이 만들어낸 황홀경에서 깨어나 암자로 내려오니 동쪽 밤하늘에 은빛 둥근달이 은은히 떠오른다. 월출(月出)이다. 이곳에서 일출(日出)과 낙조(落照), 그리고 월출(月出)까지 볼 수 있으니 과연 명소 중의 명소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변산 팔경 중에 두 가지가 월명암에 있으니 월명운애(月明雲靉)와 서해낙조(西海落照)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구름이 분주하더니 오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마 봄소식이 늦은 산사에 꽃소식을 가져오려는 듯 밤새 빗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뜰 앞의 늙은 벚나무 아래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연당(蓮塘)에서 비단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연못 가득 까맣게 낳은 개구리 알이 봄비에 떠내려갈세라 걱정이 되었나보다.
날이 밝아도 비는 계속 오더니 오후 늦게 그쳤다. 이젠 짙은 안개가 산을 덮는다. 뽀얀 안개 속에서 커다란 나무들이 실루엣으로 보일 듯 말 듯하고, 전각과 당우가 낡은 그림처럼 희미하게 보이는데 저만큼 뒷짐 지고 천천히 걷는 안개 속 도반(道伴)이 신선(神仙)처럼 느껴진다.
사찰의 음식은 채식이다. 동물성 식품은 금기시 되어있다. 그렇다고 별다른 조미료도 없다. 그런데도 도시의 일류 음식점 못지않게 맛을 낸다. 아마 이 청정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재료에 마음속의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깨끗이 씻어낸 수행자의 순수한 마음과 정성이 손맛으로 살아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루 세 끼 공양을 이곳처럼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다.
이 암자의 역사는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낡아 허물어지거나 전란으로 소실되어 예닐곱 차례 중창 불사를 했다고 한다. 대웅전과 관음전은 깨끗이 단청이 되어 전각의 멋을 풍기나 사성선원과 무애당 등 부속 건물은 어려운 시절 급작스럽게 지은 듯 덧달아낸 문이 한옥의 품위를 낮추고 있다. 우리가 묵은 방사는 맞배지붕으로 지은 새집인데 방금 이사 온 것처럼 방안이 산뜻했다. 나무 기둥엔 송진이 배어나와 있고, 단청(丹靑)은 물론 당호(堂號)도 아직 걸지 않았다.
난방시설은 장작 보일러인데 초저녁에 불을 지피고 자기 전에 더 넣어야 아침까지 온기가 유지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아침에 다시 불을 넣어야 낮에 방에서 정진을 할 수 있다. 마침 축대 공사를 하는 기술자들이 옆방에 기거하여 불을 지피는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
이번 정진은 새벽 두 시간, 오전 세 시간, 오후 세 시간, 저녁 두 시간, 모두 열 시간으로 짰다. 정진은 생활을 하면서 병행해야 하지만 아직도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간에 화두를 드는 것이 익숙하지 못하여 좌선에 더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굳은 몸을 풀기 위해 하루에 한두 차례 포행을 나선다. 암자 남쪽으로 능선 따라 직소폭포와 내소사 방향으로 오솔길이 나있다. 묵묵히 길을 걸으면,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드문드문 걸려있는 나무 이름 팻말을 보는 둥 마는 둥 한가로이 나무타기를 하며 지저귄다. 산모롱이에 앉아 산 아래 널려있는 기암절벽을 감상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태나무의 껍질을 벗겨 입 안 가득 쓴맛을 확인해 본다
.
6일간의 예정된 시간이 흘러가고 하산할 준비를 마쳤다. 부처님께 삼배(三拜)를 올린 후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을 찾아 합장례(合掌禮)를 올린다. 산중턱에 올라 우리가 묵었던 암자를 되돌아본다. 저곳에서 속세의 모든 분별과 시비, 애증과 갈등을 잊고 무쟁삼매(無諍三昧)의 시간을 보내며 자연과 하나 되어 너와 내가 없는 참살이를 살지 않았던가! 며칠 있으면 하얀 벚꽃으로 눈부시게 수놓이고 그 위에 아름답게 비춰질 일출(日出)과 낙조(落照)와 월출(月出)을 상상해본다. 하늘이 발아래까지 내려와서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불러 모아 구름 위로 치켜 올려 놓은 월명암에 봄이 오고 있다. 내려오는 산길 양지쪽에 빨간 진달래 한 송이가 수줍게 피어 세상을 살핀다. 어느 중생의 가슴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꽃피울까 하고.(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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