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상원사에서
안동에 사는 친구 명덕 거사와 함께 치악산 상원사에서 일주일을 묵어 올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내 차는 안동에 두고 친구의 차를 타고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충북 제천을 지나 신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치악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치악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성남매표소를 지나 좁은 농로길로 약 2㎞쯤 달리자 산 아래 소형차 대여섯 대를 댈 수 있는 공터가 보였다. 더 이상 차가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날씨는 맑고 따뜻했으나 계곡의 맑은 물과 지난해 떨어진 낙엽을 뒤집어쓰고 그늘진 구석에 두툼하게 숨어있는 허연 얼음판이 찬바람을 가끔 뿜어낸다. 산길을 막 들어서려는데 까만 비닐하우스 앞에 손으로 써서 꽂아 둔 하얀 팻말이 보인다. ‘상원사로 오시는 불자님들은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거름 한 봉지씩 운반해 달라’는 부탁이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고산에 위치하여 사찰의 모든 생활물자를 인력으로 운반해야하는 고충을 알듯했다. 거름을 한 봉지씩 배낭에 달고 새로 나온 나뭇잎의 상큼한 가지를 손으로 밀치며 골짝길을 들어섰다.
이 골짜기를 사람들은 상원골이라 부른다. 깊은 땅속 얼음에서 녹아내리는 물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제법 많은 양의 계곡물이 수천 년 동안 깎아내려 하얀 속살을 들어낸 우락부락한 바위를 휘감아 떨어지는 소리는 세찬 바람 소리로 오해되어 가끔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를 쳐다보게 만든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지형이 험악하여 여러 차례 건넜던 도랑을 다시 건너는 일을 반복한다. 등산객을 위해 작은 철교를 만들어 놓았는데 여섯 번째 쯤 다리를 건너니 개울은 양쪽으로 갈라지고 길은 왼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푸른 이끼를 온몸에 감싸고 있는 바위 아래에서 손을 적시고 돌아서니, 작은 통나무를 깎아 기둥을 양쪽에 박고 1m 쯤 되는 긴 것은 가로로 걸쳐 만든 가파른 절벽길 계단이 하늘을 향해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둘은 이마와 등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그 통나무 계단을 한 발 한 발 옮겨 놓으며 숨을 헐떡일 뿐 서로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오르다가 나도 모르게 돌무더기 옆에 비스듬히 누었다. 벽안의 청년 한 사람이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그 자리에서 김밥을 꺼내먹었다. 비구니 스님 두 분이 내려가신다. 다시 힘을 내서 오르니 왼편에 쌍룡수 샘터 안내표지가 저만큼 꽂혀있다. 조금 더 오르니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40여 미터의 벼랑 꼭대기에 커다란 용마암이 솟아있고 그 위에 사각정 보은의 종각 지붕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목적지 상원사다. 연녹색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난 이 선경에 시선은 저절로 멈추어졌다. 그 자리에 선채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혼을 잃은 듯 나는 발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호수처럼 맑은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내려가던 조금 전의 그 청년이 우리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뛰어 올라가버린다. 굽은 길을 다시 돌고 돌아 좀 더 오르니 남대봉 가는 이정표 아래 이곳이 해발 1,100m라고 씌어있다. 고개를 드니 절의 오른쪽 산비탈에 길이 나있고 그 길 입구에 일주문이 서 있다. 우람한 두 기둥이 떠받쳐주는 처마 아래 ‘雉岳山 上院寺’라는 현판 글씨가 아담하게 눈에 들어온다. 두 손 모아 경건하게 예를 올리고 일주문에 들어섰다.
산기슭으로 휘어진 길을 따라가는 오른쪽 낭떠러지 아래에는 계단처럼 좁은 채마밭이 몇 뙈기 보인다. 가건물로 지은 나직한 공양간 앞에 미리 온 등산객이 갖다 놓은 노란 거름 봉지가 길섶에 담을 쌓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 거름 봉지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백 평 남짓한 절 마당에 올라서니 그리 크지도 않고 그리 높지도 않게 지은 가로 세 칸, 세로 두 칸 대웅전이 편안하게 자리 잡고 상원골을 내려다보며 저 멀리 점점이 보이는 수많은 산 능선을 포근히 안고 있었다. 경내에는 아무런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대웅전 앞마당으로 나오니 가운데에 삼층 석탑이 바람을 피하듯 몸을 움츠리고, 절 마당을 거의 차지하는 넓은 용마 바위 끝자락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보은의 종’ 범종각이 풍설에 휘어진 채, 천 년을 버티어 온 노송과 우람한 전나무, 계수나무들을 병풍삼아 반드시 지켜야할 자리인 듯 위풍당당하게 사모지붕을 뽐내고 있다. 종각 옆 바위 위에 세운 보은의 종 유래와 불사 내역을 기록한 비가 보인다.
‘옛날에 한 나그네가 무과를 보러 가던 중 이곳 적악산 기슭을 지나가게 되었다. 길을 가다보니 어떤 구렁이가 꿩의 집을 습격 하여 꿩을 잡아먹으려 하는 것이다. 이를 불쌍히 여긴 나그네는 활을 쏘아 그 구렁이를 잡아 죽였다. 해가 저물어 하룻밤 묵을 곳을 찾다가 외딴 집을 발견했다. 그 집에서 고운 소복 차림의 여인네가 그를 맞았다. 그런데 그가 잠을 자다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깨보니 하얀 소복의 그녀는 어디 가고 커다란 구렁이가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인이 구렁이로 변하여 그를 꼼짝 못하게 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참이었다. 나그네는 이 여인이 낮에 죽인 그 구렁이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그네는 구렁이를 죽였던 연유를 암구렁이에게 말했다. 그러자 암구렁이는 나그네에게 날이 밝기 전 상원사의 종이 세 번 울리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나그네는 살기를 포기하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렸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적적으로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암 구렁이는 약속을 지키고는 스스로 물러갔다. 나그네는 날이 밝자 종루를 찾아가보았다. 그러자 꿩 세 마리가 머리에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나그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던 꿩이 새끼와 함께 나타나 나그네를 살리기 위해 머리를 부딪쳐 죽어가면서 종을 울렸던 것이다. 이들 꿩 세 마리는 죽을힘을 다해 종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결국 죽음으로 은혜를 갚았던 것이다. 그 후 적악산(赤岳山)이었던 이 산을 치악산(雉岳山)이라 하고 이 종을 보은의 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각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왼쪽에 개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네 칸 건물 신검당이 동기와(銅蓋瓦)를 지붕에 이고 따스한 햇살을 마주하며 기둥과 서까래의 고운 나무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신검당과 대웅전 사이 뒤꼍에 심우당이 있고, 신검당 오른쪽으로 난간을 돌아 계단을 오르면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왼쪽 뒤편에는 독성각이 커다란 바위를 앞에 놓고 숨어 있다. 앞에는 해우소 가는 길 따라 구 전각을 철거한 자재가 함석 조각으로 덮인 채 길게 쌓여있다.
커다란 전나무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30m 벼랑 밑 비탈에 200여 평 돼 보이는 밭에 공양주 보살이 혼자 감자를 심고 있었다. 심검당 툇마루에 배낭을 놓고 걸터앉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풍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신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저 멀리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능선과 능선 사이에 보일 듯 말듯 숨어있는 점들이 마을인 듯 느껴진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연두색 두꺼운 작업용 비닐앞치마를 두른 공양주 보살님이 빈 바구니를 들고 대웅전 앞마당을 거쳐 우리 쪽으로 왔다. 명덕이 며칠 전 전화로 연락한 사람이라고 하자 반갑게 알아보면서 신검당 입구 방사에 묵으라고 안내를 해주신다.
그리고 지금 이 절의 주지 스님은 원주 시내에 있는 세명 선방에서 신도들을 지도하시기 때문에 당분간 오시지 못하고 러시아 남학생 한 사람만 신검당 끝 방에서 묵고 있다고 하셨다.
이야기 소리에 러시아 학생이 툇마루로 나왔다. 절을 올라 올 때 본 파란 눈의 바로 그 청년이었다. 공양주 보살의 소개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러시아 청년인데 영국 런던대학교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전공하는 유학생으로 어학 연수차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을 갈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말은 아주 간단한 생활어도 구사하기 힘들어한다. 이름은 피터라고 했다. 조용한 곳이 좋아 한국 한동대학 친구의 주선으로 이 절에 머물게 되었단다.
공양주 보살님이 소쿠리에 씨감자를 가득 담아 이고 대웅전 앞마당을 지나려다가 우리를 보고 미안한 듯 주저하며 말했다.
“거사님들, 감자 놓는데 밭을 일구는 울력을 좀 해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제 혼자 오늘 다 할 수 없어서요.”
우리는 쾌히 승낙하고 젊은 피터와 함께 해우소 옆에 있는 창고에 가서 삽과 곡괭이를 하나씩 들고 전나무 사이 벼랑길을 허우적거리며 내려갔다.
겨우내 다져진 흙을 일구어 이랑을 내고 감자를 심는 일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공양주 보살님은 오늘 일을 마칠 요량으로 먼저 일하던 밭뙈기에서 이랑을 지우고 감자를 놓아 검은 비닐로 긴 이랑 전체를 한 골씩 덮어씌워나간다. 일하는 모습이 능숙한 농사꾼이다. 한편, 우리 세 사람은 묵은 밭골을 하나씩 차지하고 뒷걸음질하며 발로 삽을 힘껏 밟아 흙을 파서 뒤집어나갔다. 한 걸음쯤 작업을 하면 힘이 빠져 숨을 헐떡거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멍하니 서 있거나 밭골에 주저앉아 쉬었다가 다시 삽을 잡고 일구기를 한 시간 여 만에 세 사람이 한 뙈기를 마쳤다. 아직 같은 크기의 밭이 하나 더 있다. 보살님이 새참으로 빵을 가지고 왔다.
산 아래에는 개나리, 벚꽃이 한창인데 이 밭에는 아직도 결빙된 흙덩이가 군데군데 삽과 괭이질을 거부하고 있다.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명덕은 뛰어난 재담과 짓궂은 장난으로 피터와 나를 웃겼고, 나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피터 역시 힘들어하며 연신 우리가 파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언어가 달라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해도 사람의 기본생활은 어느 나라든지 비슷하니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읽고 즐겁게 웃으며 작업을 했다.
드디어 두 뙈기의 작업이 끝나고 공양주 보살님이 하는 비닐 덮는 작업을 도와 오늘 일을 마무리하였다.
저녁 공양이 끝나고 신검당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범종각과 일주문 사이로 저 멀리 희미하게 늘어선 능선이 불그레한 저녁노을에 보일락 말락 가물거리다가 어둠 속에 사라지고, 신림 인터체인지 가로등이 별과 함께 피어올라 나지막하게 반짝인다. 옆방의 피터가 이불을 툇마루에 깔고 가부좌를 한 채 넋을 잃고 일몰의 황홀경에 빠져 있음을 안 것은 산정의 한 줄기 찬바람이 귓가에 스칠 때였다.
이곳은 일 년에 몇 차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모아서 원주에서 헬리콥터로 운송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절 살림을 도맡아 하는 공양주 보살의 절약 생활은 습관이 돼있다. 밤이 되면 모든 전등은 끄고 심야전기 보일러로 시공했던 난방도 장작 보일러로 바꾸어 사용한다. 아직 마루 시공을 못한 신검당 벽에는 재건축할 때 헬리콥터로 기둥과 서까래, 그리고 연료로 쓰는 가스통을 운반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과 기둥을 세우고 상량식을 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이 액자에 걸려있다. 이런 취약한 곳에 머물면서 어찌 불편하다고 훈훈하게 난방을 할 수 있으며, 어둡다고 전등을 여기저기 밝힐 수 있겠는가? 희미한 전등 하나를 켜고 우리는 저녁 세 시간의 참선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 운수 선우회원들은 어느 사찰을 가도 공부하는 시간을 미리 정해 두었다. 새벽 예불을 시작으로 세 시간 참선, 오전 세 시간 참선, 오후 세 시간 참선, 밤 세 시간 참선 후 취침, 모두 12시간을 정진목표로 하고 있다. 처음 문경 대승사 참선 수련에 참가했을 때는 반 가부좌를 하고 50분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고 견디는 훈련에 혼신의 힘을 쏟으며 힘들어 했으나, 한 5 년의 시간이 흐르니 이제는 화두와 번뇌의 자리다툼에 빼앗기는 시간이 더 안타깝게 생각된다.
이튿날, 해가 서산을 기웃거릴 때 객승 한 분이 오셨다. 승가대학에 다니시는 학승으로 이 절에 몇 차례 온 듯 공양주 보살은 반갑게 맞았다. 공양주 보살은 그 스님에게 감자를 같이 심자고 부탁하고 어제 우리가 일구어 놓은 그 밭으로 감자씨를 가지고 함께 가셨다. 저녁 공양 종소리가 울리자 피터를 불러 함께 공양간으로 갈 때, 그 스님이 목에 흰 수건을 걸치고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린 채 맨발로 흰 고무신을 신고 샤워장 문을 열었다. 등 양쪽으로 땀에 밴 승복이 어제 우리가 두어 시간 동안 힘들게 일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절집에서는 승속(僧俗)이 엄격히 구분된다. 언제나 공양을 할 때는 별도의 자리에 스님들의 음식을 차려드리고 먼저 공양을 드신 뒤에라야 신도들이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러는 것이 부처님을 모시는 스님에 대한 재가자의 예우이며, 또한 스님들은 속가에서 출가를 할 때 끊어버린 인연의 결심을 지키는 계율이기도하다. 설령 자식이 스님이라도 같은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부모는 자식인 스님에게 존댓말로 응대해야 한다.
그날 밤, 공부를 마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어둠 속에서 스님의 가사 장삼이 실루엣처럼 펄럭이며 보은의 종이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꿈속인양 듣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상원사 범종각에서 나는 소리였다.
새벽 3시, 어제 그 스님이 예불을 올리고 계셨다. 눈을 비비며 옷을 챙겨 입고 법당으로 갔다. 법당등이 은은하게 부처님과 협시보살, 그리고 후불탱화를 비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삼배의 예를 올리고 가부좌를 한 뒤 두 손을 모았다. 장엄한 범종 소리는 천천히 스물여덟 번 울렸다.
욕계(欲界) 6천(天)과 색계(色界) 18천, 무색계(無色界) 4천 등 천계(天界) 28천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깨우침의 소리이다. 범종 소리를 들으면 교만하지 않으면서 엄숙하고, 둔하지 않으면서 깊은 지혜의 울림이 느껴진다.
뜨락을 쓸되 먼지 일어나지 않고 연못 밑을 비추되 적시지 않는 달빛처럼 청정하고 엄숙한 자비로 늘 깨어 있는 수행자의 손길이 만들어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 모른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이 시각, 범종 소리에 실린 내 마음이 천계(天界)를 가물가물 오르고 있을 때, 스님의 목탁 소리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경건하고 정성이 지극한 마음으로 예불을 올리고 다시 방사(房舍)로 돌아와 새벽 정진을 시작한다. 화두를 들어보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조금 전의 범종 소리가 먼 하늘 끝에서 맴을 돌고 있다. 인생의 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이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넷째 날이 되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오전 9시 쯤 되었는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한 시간 공부를 마치고 툇마루에 나오니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줄지어 경내를 돌아보고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기도 하고, 넓은 용마 바위에 앉아 간식을 먹기도 했다. 산방에 묵고 있는 우리가 이상하다는 듯 힐긋힐긋 보다가 자고 갈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일요일이라도 등산객은 오전 10시에 올라와서 오후 3시 쯤 되면 모두 하산하기 때문에 절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은 겨우 서너 시간뿐이다.
우리도 점심 공양을 하고 남대봉으로 포행(등산)을 가기로 했다. 치악산 남쪽 봉우리인 남대봉은 해발 1,182m로 상원사에서는 30분 정도 걸으면 오를 수 있다. 높은 산의 기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린다. 잠시 해가 났다가도 금방 비가 내리고, 바람이 안개를 몰고 휘몰아치다가도 어느새 고요해지는 것이 고산의 날씨다. 가깝다고 우장만 챙겨들고 산길로 들어섰다. 소나무와 잡목이 뒤엉켜 하늘을 덮은 길가에는 조릿대가 바람에 살그락거리며 잎을 비비고 있었다. 산 능선을 오르니 안개비가 몇 무더기 산기슭을 쓸고 지나간다.
능선 따라 남대봉을 오르는 왼편 아래쪽에 영화에서나 봄직한 물위로 솟는 물고기 모양을 한 봉우리가 머리에 반송을 이고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우뚝 서 있다. 나는 무심히 바라보며 저 꼭대기 소나무 밑에서 좌선하던 신선이 돌아 나올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북쪽으로 발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첩첩 산봉우리와 골짜기들이 내게 쌓여 있는 업장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남대봉 정상에는 산불 감시초소가 하나 있고 옆에 헬기장이 있다. 여기저기서 같이 온 사람들끼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모두 무거운 등산 장비를 갖추고 힘겹게 올라 왔는데 맨몸으로 산에 오른 우리를 보고 산에 시찰 왔냐면서 의아해하였다. 바람이 제법 세다. 파카를 옴츠리고 내려오면서 능선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영원사 골짜기로 향했다. 길이 워낙 가파르고 험하여 100m쯤 내려가다가 돌아 올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포기하고 다시 상원사로 넘어왔다. 두 시간 정도 산행을 마치고 절에 도착하였다.
이 절의 보배는 공양주 보살님이시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이 나이까지 주지스님과 30여 년을 이 절에 살면서 사찰의 모든 살림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건물관리, 농사일, 시설물 손질, 신도관리, 객스님 접대, 공양 짓기, 작업 인부관리, 생활물자조달은 평소에 하는 일이지만 대웅전과 신검당, 산신각을 개축하는 대공사 때도 신도들의 울력을 거의 받지 않고 혼자 인부들 치다꺼리를 다 해냈다고 하니 정말 억척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양간 벽에 붙은 몇 장의 안내문을 보니 반듯한 글씨에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된 내용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첫날 일주문 기둥에 잃어버린 개를 찾는 호소문이 하도 간절하고 애절하여 몇 번 다시 읽어 보았는데 역시 공양주 보살의 문장 솜씨였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처럼 맑고 깨끗한 도량에서 부처님의 공양을 받으며,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생활하는 즐거움이 하늘 아래 또 어디 있겠느냐며 이것이 극락정토라고 하신다.
다음날, 아침 공양이 끝나자 공양주 보살이 우리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신다. 내일 신도들과 사찰순례가 예정되어 오늘 원주 세명 선원에 내려가서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제천에 있는 거사님 한 분이 오늘 밤 여기 와서 절을 지키기로 했고 내일 저녁이면 자기가 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취사를 잘 해 보이는 명덕 거사을 향해 쌀독의 위치와 가스 불 절약 사용법, 반찬의 보관함, 라면 창고, 밥 짓는 방법 등을 소상히 말하는데 명덕 거사는 듣지도 않고 나를 쳐다보고 웃기만 한다. 오후에 공양주 보살님은 떠나고 피터와 세 사람만 남았다.
저녁 공양 시간이 될 무렵, 원주에서 이 절 신도이신 남녀 두 분이 올라왔다. 나는 명덕 거사님을 보고 귓속말로 여신도(女信徒) 분이 오시니 자네가 밥 짓는 시름은 놓았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 사정을 이야기했고, 두 분은 오늘 밤 여기서 기도를 올린다고 하면서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공양간의 종이 울리지 않았다. 의아해서 공양간으로 내려 가보니 벌써 밥솥에 남은 밥을 두 분이 먹고 산신각으로 올라가버렸다. 우리는 인정 없는 사람들이라고 중얼거리며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명덕 거사가 대웅전에 보관한 라면을 한 상자 찾아오고 나는 그동안 냄비에 물을 끊였다. 라면이 다 익을 때 종을 울려 피터를 불렀다. 셋은 라면과 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여느 때와 같이 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서툰 요리라서 그런지 먹고 나니 그날 저녁 내내 입에서 라면 설익은 냄새가 났다.
어둠이 산사에 내릴 때쯤, 40대로 보이는 거사님 한 분이 황토색 생활 한복 차림으로 올라왔다. 아마 오늘 오기로 약속했던 제천에 사시는 그분인 듯했다. 그 거사님은 신검당에 올라오자마자 집주인처럼 빗자루로 방과 툇마루를 쓸고 나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나중에 공양주 보살에게 들으니 이분은 오륙년 전 이 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그만 두고 환속했다고 했다.
그분이 겸손하게 좌선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간청을 하기에, 내가 기초 자세에 대해 몇 마디 말하고, 선의 필요성과 화두 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명덕 거사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법문을 해주었다.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나는 이처럼 논리 정연하게 청자의 마음을 움켜쥐는 달변에 감동을 받아 이렇게 훌륭한 도반과 가까이 있게 해주신 부처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두 시간을 같이 참선을 했다. 밤 늦게부터 비가 후둑후둑 내렸다.
이튿날 아침, 어제 밤에 내린 비에 풀잎이 산뜻하게 목욕을 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머리손질을 하며 엷은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내미는 햇살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제 왔던 신도들은 아침 일찍 모두 하산을 했다. 아침 공양은 내가 밥을 지었다. 어제 저녁처럼 또, 라면을 먹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였다. 집에서도 간혹 밥을 지어 본 경험이 있어서 별로 어렵지는 않지만 혹시나 하며 걱정을 했다. 밥은 약간의 누룽지를 만들며 잘 지어졌다. 피터를 불러 세 사람은 맛있게 공양을 마치고 구수한 숭늉까지 끓여 마셨다.
그런데 피터가 갑자기 오늘 하산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여기서 열흘 동안 머문 비용을 내고 싶다고 하였다. 주인 없는 나그네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니기에 경주에 가 있을 공양주 보살에게 전화를 했다.
“돈을 받겠어요? 먼 나라에서 학생이 부처님 찾아 좋은 인연으로 왔는데……. 그냥 보내시고요. 다음에 또 오라고 전해주세요.”
나는 공양주 보살님의 자비로운 말씀에 몇 번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다. 피터가 이 말을 몸으로 전하는 나를 보고 싱긋이 웃으며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내게 내밀었다. 표정으로 봐서 매우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잠시 만나 함께 지냈지만 성품이 온화하고 사려 깊고 예를 아는 청년임에 틀림없다. 일상적인 대화는 못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과 표정으로 마음과 심성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그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님을 대하는 다정다감한 인정을 알아차리고 흡족해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공양주 보살님은 피터가 온 후, 양식에 익숙한 유럽 손님의 식사를 위해 절에 올라오는 신도가 있으면 빵을 사오라고 특별히 부탁을 하는 등 피터에 대한 배려가 놀라웠으니 말이다.
피터가 짐을 꾸려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나는 못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꼭 잡고 우리말로 ‘학업을 열심히 하여 나라와 인류를 위한 좋은 일을 하기 바라며 먼 길 조심해서 귀국하라’는 내용을 말하면서 의미를 느낌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했다. 그는 한두 마디 경청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웃기만 했다. 명덕 거사님은 인사를 나누고 난 뒤, 그를 대웅전으로 데려가서 부처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도록 가르쳤다. 피터는 대웅전 마당을 내려가기 전에 합장 반배하고는 우리에게도 예를 표하였다. 그가 일주문을 나서서 다시 절 쪽을 향해 공손하게 합장 반배를 올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우리는 소리쳤다.
“GOODBYE ! PETER !"
우리는 손을 흔들어 환송하고 피터도 두 손을 흔들며 일주문 밖으로 멀어져 갔다.
주인도 떠나고 나그네도 떠난 텅 빈 이 높은 산마루 절에 앉아 있으니, 오늘따라 바람도 잠을 자고 희뿌연 구름도 하늘 가득 누워있다. 전나무 모양으로 위장한 전신주에 앉아 그리도 시끄럽게 쪼아대던 딱따구리도 둥지를 찾아가고, 저 산 아래 골짜기에 저녁 안개도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 두 사람도 이런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절간같이 조용하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저녁 공양을 끝내고 어둠이 내리는데 전화가 왔다. 공양주 보살님이다. 반가워서 얼른 받았다. 아직 원주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아마 늦어서 상원사까지 못 올라가니 오늘 밤 두 분이 수고 좀 하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쳐다보고 말이 없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다. 자기 집을 밤새 혼자 지키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우리나라 최고지의 사찰에서 스님도 없고, 공양주도 없고, 아무 객인도 없이 단 두 사람이 밤새 이 낯선 절을 맡아 지키라니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는 내심 서로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걱정스런 말을 하면 명덕 거사가 위로의 말을 했고, 내가 태평한척하면 명덕 거사기 걱정스런 말을 하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밤에 도둑이 들면 어쩌나? 화재가 나면 어쩌나? 갑자기 천재지변이 오지 않을까? 보물이나 국보는 없는 사찰이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간 이 절에 묵으면서 들은, 개를 도둑맞은 이야기며, 대웅전 불전함을 파손하고 돈을 빼내간 이야기가 더욱 현실처럼 느껴졌다.
공양간 문단속을 하고 방사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전각의 조명을 껐다. 하늘에는 구름이 별을 삼켰고 바람은 안개구름을 몰고 와 내 얼굴에 가볍게 뿌리고 지나간다. 추녀 밑에 매달린 풍경만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이곳이 산사임을 간간이 들려 줄 뿐이다. 저녁 세 시간의 공부가 끝나고 둘은 잠이 들었다.
새벽 2시 쯤, 나는 소피가 보고 싶어 잠을 깨니 밖에서 비바람 치는 소리가 났다. 순간 나는 지금 이 절에 우리 둘만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덜컹 겁이 났다. 몸을 움츠리고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은 더 오지 않고 몸을 뒤척이며 소피를 참으려고 여러 가지 생각을 굴렸다.
이 절의 해우소는 유난히도 멀다. 그리고 대웅전 동쪽 아래쪽 외진 나무 그늘 속에 판자로 조잡스럽게 꾸미고 지붕에는 낡은 함석을 덮어 밝은 날에도 으슥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이런 곳을 이 깊은 밤에 홀로 해우소를 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잠든 친구를 깨우려니 미안한 마음이 용서를 하지 않는다.
‘이때까지 절에 찾아와 공부하는 이유가 뭔가? 불법을 공부하는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과 신장들이 외호해 주시기 때문이 아닌가? 부처님보다 더 무서워해야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색즉시공이라 했다. 이 세상 모든 유정과 무정은 인연 연기의 조건에 따라 잠시 형상 으로 머물러있는 듯 보이나 각자의 인연에 따라 잠시도 쉬지 않고 성주괴공의 무상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 일부이거늘 함께 있는 것이지 무서워할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곧 마음이 편안해지고 조금 전까지 무서워하던 마음이 따스한 물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졌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방문을 열었다. 그때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전등을 켜며 일어났다. 손전등을 들었지만 밖은 너무도 어두웠다. 앞 사람이 겨우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는 뒷사람에게 발을 옮기도록 비추어 주어야했다. 바람은 초저녁보다 세게 불어 쉴 새 없이 풍경소리가 뎅그렁 거렸고, 안개는 어느덧 비가 되어 재킷후드를 뒤집어 쓴 두 사람의 얼굴에 차갑게 뿌렸다. 신검당 앞 나무로 된 난간을 건너 대웅전 뒤로 멱우도가 그려진 벽을 따라 돌아가는 첫째 기둥에 해우소로 가는 외등을 밝히는 스위치가 있다. 스위치를 올렸다. 대웅전 뒷벽 저 끝에서 30촉 희미한 백열등이 긴 나무 그림자를 출렁이며 스치는 빗방울을 비추고 있었다.
대웅전 동쪽 끝에서 해우소까지 약 30m는 신검당을 개축할 때 뜯은 헌 목재 더미가 길게 누워있다. 그 위에 덮어놓은 함석 조각이 바람에 스치는 소나무 가지와 빗방울 소리로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둘은 머리를 푹 숙이고 발끝만 내려다보며 질퍽해진 흙길을 피해 이리저리 뛰면서 깔아놓은 작은 박석을 골라 밟으며 해우소 쪽을 향했다.
내가 볼일을 끝내고 먼저 나오니 친구가 뒤따라오며 손전등으로 내 발쪽을 비춰주었다. 대웅전 뒤편 처마 밑에 올라와 몇 걸음 걷다가 돌아보니 친구는 저만큼 떨어져 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무심히 대웅전 뒤편 큰 바위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독성각을 멍하니 바라보며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다.
“거는 왜 보노!”
갑자기 화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는 잔뜩 겁을 먹고 뒤따랐는데 내가 너무 빨리 걷자 독성각에서 무엇이 나타날 것만 같아서 공포에 질린 한 마디 말이었다. 순간 나는 겁먹은 친구도 잊은 채 대화도 하지 않고 앞장서 온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내 마음만 다스리며 말없이 걸어 온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남의 마음도 읽고 도반의 안심을 끌어주어야 하는 것을 어찌 생각하지 못하였단 말인가? 날이 밝자, 친구는 독성각을 혼자 가서 참배하고는 독성각 앞을 지나는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말하면서 지난밤의 분위기와 무서웠던 심정을 토로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배낭을 챙긴 후 공양주 보살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는 오늘 하산해야 하는데 언제 도착하느냐는 질문에 지금 출발하니 그대로 두고 하산하라는 것이다.
대웅전에 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범종각을 뒤로한 채 일주문으로 향했다. 따스한 햇살이 비에 젖은 나뭇잎에 내려앉아 싱그럽게 반짝인다. 일주문을 나와 뒤돌아보니 자연과 어우러진 전각이 하도 아름다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안아주셨던 부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한동안 올렸다. 둘은 말없이 한참을 내려오다가 올라오는 공양주 보살을 만났다. 그녀는 땀에 젖은 배낭을 벗고 수건으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닦으면서 나무 그늘에 앉아 이틀 밤 동안 있었던 일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거사님들 덕분에 성지순례를 마음 놓고 다녀왔다는 인사도 빼지 않았다.
우리는 난생 처음 절을 이틀 밤이나 지키느라 좋은 추억이 되었다며 일주일의 보살핌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서로가 합장의 예를 올리고 돌아섰다. 저만큼 올라간 그녀의 땀에 젖은 법복 자락이 더욱 가볍게 펄럭인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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