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말로 물질적인 색의 세계가 공의 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표현한 불교교리이다.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대립과 차별을 넘어서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라의 원측(圓測)은 이에 대하여, 색은 본래 없는 것을 망념으로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공하고, 색은 인연 따라 존재하고 멸하는 가유(假有)의 색이기 때문에 공할 수밖에 없으며, 색이란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공의 본질이기 때문에 역시 공하다고 변론하였다. 이 명구는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곧바로 그 실체를 꿰뚫어 보라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이는 인간 마음(心)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색불이공 공불이색도 같은 의미이다.
(경문)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해석) 사리자여,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물질이며, 감각, 지각, 의지, 계속되는 생각, 최후의 인식도 그러하느니라.
이 글의 논리적 비약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이 어떻게 허공과 같고, 허공이 어떻게 물질이라 할 수 있는가?
좀 더 쉽게 풀이하면, ‘色卽是空’은 ‘그 모습(色)은 실체가 없어서(空), 모양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空卽是色’은 ‘볼 수 없는 것(空)이 또한 모습으로 눈에 보이는 온갖 것(色)들이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의문이 간다. 색(色)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실체가 없어서 공(空)이라니 무슨 의미인가?
지식으로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적으로 접근해 본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은 모두 여러 요소들의 집합체이다. 예를 들면, 한 채의 집은 나무 기둥과 흙담과 지붕의 기와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요소의 집합은 있으나 ‘집’이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空)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핵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는 모든 원자는 핵을 갖고 있고 그 주변을 전자들이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데, 핵은 원자 지름의 10만 분의 1에 불과하여 물질의 99.999%는 비어있음을 실험으로 증명하고 “물질은 텅 비어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현대 과학에서도 소립자를 가속하여 생긴 쿽(quark)을 재 충돌 시키니 코스몬(cosmon)으로 빛이 되어 사라짐을 확인했다(상대성원리 E=MC²). 즉 어떤 물질이라도 분해하고 분해하면 마지막에는 흔적 없는 에너지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공(空)이다.
이 세상,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물질도 가화(假化)의 존재가 아닌 것이 없다. 나아가서 정신작용인 감각, 지각, 의지, 계속되는 생각, 최후의 인식(受, 想, 行, 識)도 역시 그러하다(亦復如是)라고 했으니 사람은 공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식되는 모든 것의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며 살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그러면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무슨 말인가? 빈 허공이, 곧 볼 수 있는 물질이라니 무슨 말인가?
공(空)이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물질이 분해되어 에너지 상태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항상 조건이 주어지면 새로운 생명이나 물질이 탄생활 수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크게 말하면 우주의 빅뱅(big bang)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들어있는 이런 허공의 세계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표현한다. 허공인데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있어 조건이 맞으면 무언가 생성될 수 있는 상태이니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에 의한 인식 작용을 실상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인식 전환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지식적 이해를 초월한 상태를 추구한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사라지고 난 후에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있는 상태에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곧 공으로 보여야 하는 고도의 마음 상태를 요구한다. 이는 사람이 유위법으로 체득할 수 없고 무위법으로 시절인연을 만나야 증득할 수 있다고 조사(祖師)들은 말해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도 색즉시공이 되어야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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