톳골백년/톳골을지킨사람들

톳골을 새롭게 만든 창강(蒼岡) 강부성(姜阜聲)

주비세상 2023. 10. 13. 19:34

톳골을 새롭게 만든 창강(蒼岡) 강부성(姜阜聲)

 

백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톳골은 24대 강관수 선조께서 톳골에 이주하여 정착하신 후, 26대 강유원 선생까지 이곳을 일구고 다듬어 번창의 기틀을 닦아왔다. 선친인 강유원 선생의 여섯째 아들인 27대 강부성은 고향에 정이 깊어, 근무하던 행정공무원직을 사직하고, 톳골 본가 앞에 집을 짓고 정착하면서 톳골 대변혁의 대업을 시작했다.

 

그는 낙농에 뜻을 두고 젖소 몇 마리를 사육하면서 우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 젖소의 수가 늘어나자 고택 뒤편 목장에 인접한 전답 1천6백여 평을 모두 매입하여 목장부지로 지목을 변경하였다. 백여 두 이상 젖소를 사육할 수 있는 축사를 신축하고, 최신 사료배합기와 자동 착유시설을 갖추어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날그날 착유한 원유는 당일 출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계약한 남양 분유 회사의 수송차량이 와서 매일 수유(收乳)해가기로 계약을 했다.

농축산업은 1차 생산,  2차 가공,  3차 판매, 유통, 서비스를 포함한 체험 관광 치유까지 이 모든 산업을 융복합 산업(6)이라고 한다.

 

1차 원유 생산 산업 준비가 끝나갈 무렵, 그는 2차 가공 산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생산되는 우유를 활용한 유제품 생산을 연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전라남도 순천까지 왕래하면서 참마 요거트와 치즈 제조 교육을 받았다.

참마 요거트와 치즈 가공을 위해서는 자동화기기를 설치할 새로운 공장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자택 앞의 답 8백여 평을 매입하여 공장부지로 지목변경 후 제품생산을 위한 공장을 건설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밀크푸드연구센터 법인을 설립하고 당당하게 <안동 참마 요거트> 상표를 특허출원하여 인가를 받았고, 함께 치즈 생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융복합 산업까지 모두 염두에 두고 사업을 설계하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 치즈와 참마 요거트를 제조 생산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치즈 만들기 체험 교육장과 가족 단위 체험과 숙박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지금은 자동화된 생산라인에서 안동 참마 요거트를 제조 생산하여 대구경북지역 마트에 직접 납품을 하고, 학교급식도 하며 인터넷이나 전화로 주문을 받아 다음날 아침에 우체국 택배로 전국에 배송하고 있다. 머지않아 치즈 만들기 체험하는 아이들이 이 넓은 공장 안에서 재미있게 치즈 만드는 웃음소리가 끊어지질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모든 사업은 인프라 구축이 되어있어야 사업이 원활해진다.

그래서 그는 젖소의 사료와 참마 요거트 원료 생산을 위해 선대부터 경작해 온 삼매골 전답 이천 여 평과 그 사이에 낀, 논 일천 여평을 매입하였다.

농로 정비가 안 된 고지대 토지라서 지주들이 농작물 경작을 포기하여 황무지로 변해버린 땅을, 그는 중장비를 불러 장시간 경지정리 작업을 펼친 끝에 다랑 논밭이던 삼천 여 평의 땅을 한 필지의 농장으로 탄생시켰다.

지금 이 농장에는 마, 사료작물, 고추, 생강, 옥수수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또한, 공장과 농장을 진입하는 좁은 농로를 사업 시작 전부터 확장, 포장하기로 결심하고 농로확장과 관계되는 지주들의 승낙을 받기 위해 몇 달간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읍소하였으나 굳어있는 농민의 인식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강인한 의지 앞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으니 지주들 모두에게 농로확장민원확인서를 받게 되었다.

이들의 민원을 근거로 경북도청과 안동시청을 내 집 드나들듯 찾아다니면서 담당 공무원과 유관기관장을 설득하여, 마침내 톳골 지역 농로확장포장 사업승인을 받아냈다.

그 후, 수년 간 공사 끝에 5번 국도에서 톳골과 삼매골까지 차량이 포장농로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승용차는 물론이고 매일 왕복하는 목장의 원유 수송 차량과 주기적으로 오는 대형 사료 차량, 택배 차량도 무리 없이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업에는 자금이 있어야 일을 추진할 수 있다. 몇 년의 공무원 봉급을 아무리 아껴 두었다 한들 이와 같은 방대한 사업에는 어림도 없는 자금이다.

그리고 우리 집안은 선대부터 너무나 한빈 하여 보릿고개를 초근목피로 견뎌온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 성장한 형제가 7남매가 되나 취직을 하여 박봉으로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으니, 형제인들 어찌 투자할 여력이 있겠는가! 오직 안타깝게 모두가 속을 끓이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형제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그는 한 마디도 형제들에게 사업 지금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원망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형제간의 금전거래가 화합과 우애에 금이 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에 금융기관의 융자와 국가보조금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타고난 화술로 믿음이 가는 교우관계를 폭넓게 유지했고, 그들이 사회요직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사업추진의 난점을 해결하는데 친구들이 큰 힘이 되었으리라 짐작해 볼뿐이다.

 

사업을 추진하다 보면 어디 자금의 어려움뿐이겠는가? 일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쳐올 때도 있으니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012, 구제역이 전국을 덮쳐 곳곳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젖소를 생매장으로 살처분한다는 정부방침을 듣고 방역을 엄격히 해왔으나 2km 반경 내의 다른 목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는 바람에 안석동 목장도 매몰처분을 해야만 했다. 힘겹게 사육 두 수를 조금씩 늘려 92마리까지 늘렸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는 축사에 가득했던 젖소의 우는 소리를 잊지 못하고 허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텅 빈 목장은 지켜보며 2년의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기한이 지나자 그는 다시 소를 사들이고 사업의 투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오직 혈혈단신으로 광야에 홀로 서서 굳은 의지를 향해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하루하루 삽질을 해나갔다.

누가 그의 마음을 알아주었을까? 아마도 뒷동산 선영 망부석과 하늘만이 내려다보고 그의 뜻을 간파하고 음덕을 베푸셨으리라.

 

형제 중에서 선친의 성품을 가장 잘 이어받은 창강 강부성은 선친의 시대를 뛰어넘어 더 큰 시각으로 사업가적 성품, 사람을 끌어들이는 은은한 인정과 배려심, 굳은 결심과 강인한 추진력,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설루션의 접근, 최신 산업의 변화에 대한 전망과 대처, 각종 기기의 현대화의 활용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훌륭한 능력은 지역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참여하는 모임마다 그 단체의 중책을 맡아 능숙하게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업무기획과 추진과 문제점의 원만한 대처 등을 인정받아,

 

한국말산업육성회 사무총장 역임.

안동낙농업 동우회 회장 역임.

북후초등학교 운영위원장 역임.

북후면지역상생발전협의회 회장

 북후중학교 총동창회장

등의 중책을 맡았다.

현재 안동지역의 각종행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오지마을 위문활동, 독거노인 지원방문 등, 사회 봉사 활동에도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톳골에 이주하신 지 수십 년 동안, 곡물 생산에 주력하여 생업에만 몰두해 왔다.

그러다가 강유원 선친 대에 이르러 볏짚 매매, 소 매매 등 상업에 손을 댄 적이 있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삼매골 저수지 설치, 농지 정리, 지붕 개량, 농로 확장 등에 힘을 쓰셨다. 농기계가 없던 그 당시에는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과감한 사업이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전기가 들어왔으나 전자제품이 다양하지 않던 시대라서 호롱불 대용으로만 사용할 뿐이었다.

 

창강 강부성이 공직을 나와 톳골에 집을 짓고부터 교통과 통신시설을 신설하였고, 목장사업과 가공사업, 신농산물 생산사업을 도입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실로 톳골 백 년 역사의 혁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히 고군분투한 창강 강부성의 위대한 업적이라 하겠다. 우리 모든 톳골 가족들은 창강의 사업이 앞으로 날마다 일신하고 장구하게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기록 : 주비 강성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