톳골백년/톳골을지킨사람들

4. 26세 강유원 선생

주비세상 2009. 8. 3. 11:36

4. 26세 강유원 선생

 

 박사공파 26세()인 강유원(姜坳遠 1922-1994) 선생은 자()를 명기(明基), 택호(宅號)를 강성(江城)이라고 불렀다. 18세(歲) 되는 해에 영주시 평은면 귀골에서 자란 충주 석(石梅日 17세)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6남 1녀(성오, 성무, 성창, 명희, 성현, 부성, 은호)를 두셨다. 1994년 3월 3일(음) 73세로 작고하셨고, 부인 충주 석씨는 4년 후인 1998년 8월 27일(음) 76세 되는 해에 돌아 가셨다. 묘소는 생전에 손수 마련해 두신 안석골 자택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뒷산에 쌍분으로 내외분을 모셨다.

 

효와 예를 숭상한 강직한 선비 정신

 

선생께서는 온화한 성품에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셨고, 책읽기를 좋아하셨으며, 문중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으며, 문중 예절을 이끌어 가는 일에 모범을 보여 웃어른들에게 ‘우리 문중의 효와 예의 지킴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자녀들에게는 항상 의로운 사례를 들려주었으며 곧고 넓은 마음으로 생활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러나 생활은 어려워 선생의 조부께서 문중산에 딸린 톳골 문토인 뒷구렁밭 4 마지기와 작산 문토인 삼막골 밭 4 마지기, 그리고 논 5 마지기를 경작해 오시다가 1940년 경 일제의 토지 재분배 정책으로 일본에 몰수될 위기에 처하자 문중에서 토지대금을 염가로 몇 년에 걸쳐 분납하도록 배려하여 주어 삼막골 논 5 마지기와 밭 4 마지기를 매입하여 생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빈한하였지만 선생께서는 잠시도 남을 해하거나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추호도 허용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이셨다.

 

성실과 의지로 가세를 세움

 

강인한 의지와 사물을 궁구하는 능력을 가진 선생께서는 탈곡기 수리 기술을 스스로 익혀 추수기에 고장 난 탈곡기로 애태우는 이웃에 달려가 봉사를 해 주셨고, 추수를 마치면 평은에서 싼값으로 볏짚을 매입하여 달구지에 싣고 안동에 가서 판매하는 볏짚 장사, 벼를 농가에서 매입하여 도정 공장에 판매하는 나락 장사, 우시장에서 소를 사서 5일 장터를 찾아다니며 판매하는 소장사 등 다양한 기술과 상술을 펴기도 하셨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과 절약으로 톳골못 위 채이밭 2 마지기를 매입하였고 후에 다시 아래톳골 밭 3 마지기를 매입하게 되었다. 이 후에도 가난의 서러움과 주손으로서 가솔들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으시고 가축을 먹이고 농작물을 증산하는데 노력하여, 1958년에는 명지 바위골에 다랑논 3 마지기를 매입하였다. 이 논을 일 년 여 동안 많은 인부와 경비를 들여 손수 경지 정리를 하여 일등 호답을 만드셨다. 집의 마당 앞에 옹천 단호댁 논 4 마지기가 있었는데 가축들이 다니며 남의 농작물을 헤치는 것을 늘 송구스러워 하던 차에 풍산 숙부의 적극적인 중재로 한 마지기의 웃돈을 더 지불하고 명지 바위골 논 3 마지기와 교환하는 일을 성사시켰다.

   

끊임없는 개척과 도전

 

농지 구입과 식량 증산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선생께서는 천수답뿐인 논농사의 관수를 걱정하시다가 삼막골 5 마지기 논의 맨 윗배미에 소형 저수지를 만들었고 논마다 관수용 웅덩이를 파서 가뭄에 대비하셨다. 그리고 산골 다랑논은 작업의 어려움이 많고 농지의 효율성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후일 기계화 작업도 불가능함을 예측하시고 대대적인 개인 농지 정리 사업을 펼치셨다. 작은 저수지를 시공하는 일과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논뙈기를 한 뙈기가 200평 정도 되도록 정리하는 일을 농가 단독으로 시행한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사업이 아닐 수 없다. 중장비도 없는 이 시대는 많은 인부와 삽, 지게, 곡괭이 등의 연장과 땅 속에서 나오는 바위를 깨는 일과 운반하는 일에 필요한 도구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독농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농한기를 틈타 끝내야 하는 이 사업은 직접적으로 필요한 노임 경비와 작업 도구 외에도 부인들이 준비하는 인부들의 새참과 식사 등의 간접적인 일도 거창한 일이었다.

 

 수 년에 걸쳐 삼막골 저수지가 완공되었고, 그 아래 딸린 10여 마지기 논과 밭도 번듯하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명지 바위골 논도 3마지기를 경지 정리하여 집 앞 논과 교환하고 다시 집 앞 논 4 마지기의 경지 정리를 시작하여 두 뙈기로 만들었다. 또한 채이밭 2 마지기와 아랫톳골 밭 3 마지기도 완전히 정리하여 모든 논밭에 경운기와 이양기가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대가족으로 비좁은 두 칸 오두막이 늘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선생께서는 1948년 오두막을 헐고 숙원 사업이었던 주택을 증축하셨다. 초가 팔작지붕의 여덟 칸 겹집을 지어 방 4칸, 대청, 부엌으로 새집을 꾸미셨다. 당시에는 농한기가 되면 친척과 이웃 동네 사람들이 울력으로 집짓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2년 후, 새집의 기쁨을 한참 누릴 무렵 정부의 집단부락 강화정책으로 독가촌 소개령이 내려졌다. 집을 비우고 옹천 1동 기포댁으로 방을 얻어 10월부터 셋방살이를 하다가 다음해 2월 다시 톳골로 돌아왔다.

   

톳골 문명의 전환점

 

초가지붕은 가을걷이를 마친 뒤 지붕을 바꾸어 덮어야 했다. 이엉을 35마름이나 엮어 지붕을 털고 새롭게 이는 일을 추수 후에 해마다 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런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선생께서는 지붕개량 작업을 결심하고, 1962년 초가 지붕을 털어내고 기와를 덮는 지붕개량을 단행하셨다. 이때 맏아들 성오가 장성하여 선생의 이 사업을 크게 돕고 그 해 군에 입대하였다.

 

이런 선생의 생활환경 개선 정신은 1970년부터 시작된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정책의 하나로 대대적으로 추진한 농촌 지붕개량사업과 일치 되어 실로 선각자적인 선생의 안목을 엿볼 수 있다. 톳골에서도 새마을 운동의 수혜를 받았는데 그것은 이 외진 산골에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1976년 박 대통령의 강력한 농어촌전화사업(農漁村電化事業)으로 골짜기가 환하게 되었고 전기 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호롱불에 심지를 드리우면 밤마다 그을음으로 얼굴과 옷이 시커멓게 되었고, 밤에 화장실 갈 때면 초롱불을 들고 나가야 했고, 겨울밤 문틈으로 부는 바람에 호롱불이 꺼질세라 손으로 가리고 책을 읽어야 했던 불편을 덜게 되었으니 이 사건은 실로 톳골 문명의 획기적인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포용과 자비의 실천

 

선생께서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 누구에게나 너그럽고 관대한 성품을 보이셨고, 언제 어디서나 언행이 신중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모임에서도 소임을 자주 맡았다. 옹천 청년회 부회장을 맡아 회무를 원만히 보살폈고 동무에 적극 협조하여 장기동 9반장의 책무를 10여 년간 맡기도 하였다. 1942년 일제치하에서 흉년이 들자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 나머지 맏아들이 출생하였는데도 그 기쁨을 뒤로 하고 농사철이 끝난 9월 함경남도 강계로 가서 수력발전소공사에 참여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추위와 싸우면서 20여명의 팀장으로 뽑혀 6개월 동안 선도적으로 활동하시다가 가족들과 농사일이 걱정되자 이듬해 봄에 귀향했다.

 

선생은 족친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이 남달랐다. 평은에서 어렵고 외롭게 생활하는 사용(仕容) 형을 모셔 와서 도루뫼에 집을 짓고 가까운 친척과 함께 살도록 주선해주셨고, 원천에서 수원(守遠) 아우를 데려와 오래도록 집에서 함께 숙식하면서 옹천 1동에 생활의 터전을 잡도록 하는 등 친척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보살폈다.

 

한편 인정이 많으신 선생께서는 논밭에서 일하시다가 새참을 먹을 때가 되면 이웃 논밭에 일하러 온 사람이 있는지 먼저 살펴보시고 꼭 함께 불러 나누어 먹었고, 집 앞을 지나가는 길손도 잠시 쉬어가도록 배려하는 분이셨다. 품앗이하러 온 사람들이 일을 마치면 저녁 식사와 농주를 마음껏 대접하여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해 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러한 분이기에 농번기에 일손을 구하러 큰마을에 가면 다른 집 일에 못가도 강성댁 일이면 하겠다며 모두가 승낙을 했다고 한다.  

 

한빈한 가정의 주손으로 태어나 가세를 일으키려는 강인한 의지, 식량 증산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 원만한 대인 관계와 리더쉽, 소탈한 성격을 가진 선생의 일생은 그 시대 지인들의 표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