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뜻은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킨다'는 뜻으로, 곧 복수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제 몸을 괴롭힘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중국 <사기(史記)>의 '자객 전(刺客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진나라(晉)의 왕권(王權)이 흔들리자 세력(勢力) 다툼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백(知伯)은 한가(韓家), 위가(魏家)와 손잡고 조가(趙家)를 멸(滅)하려 했으나, 조가(趙家)의 양자(襄子)는 항복(降伏) 하지 않고 저항(抵抗)했다. 그런데 한(韓)ㆍ위(魏) 양가(兩家)가 모반(謀反)하여 양자(襄子)가 지백(知伯)을 죽였다.
이에 지백(知伯)의 신하(臣下) 예양(豫讓)이 양자(襄子)를 죽여 지백(知伯)의 원수(怨讐)를 갚으려고 했다.
예양은 죄인으로 가장해 궁중 변소의 벽을 칠하는 일을 하며 조양자를 암살할 기회를 노렸으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조양자가 예양을 수색하자 곧 붙잡히고 말았다.
양자가
"나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묻자, 예양(豫讓)은
"지백(知伯)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접(待接)했으니, 나도 국사(國士)로서 보답(報答)하려 한 것이다."
하고 대답(對答)했다.
조양자는 그 충성심에 감탄하며 주위 가신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예양을 풀어줬다
풀려난 예양은 복수를 포기하지 않고 숯을 먹어 목소리를 바꿨으며, 얼굴엔 옻칠을 하여 얼굴을 변형시켰다. 이러한 차림으로 구걸하는 그를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우연히 그를 알아보게 된 친우가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를 묻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고 답했다.
당시 조의 수도 한단에 새롭게 지어지는 다리를 조양자가 첫 번째로 지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 안 예양은 시체로 분장하고 다리 밑에 숨어 조양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양자가 탄 말이 살기를 느끼자 다리를 지나가지 않고 멈추어 섰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조양자가 새로 지어진 다리 밑에 시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한 낌새를 느껴 병사들을 보내 다리 밑을 수색하였고, 결국 예양의 두 번째 암살시도는 실패한다.
"너는 나에겐 왜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느냐?"
고 예양에게 물었다. 그러자 예양은
"맞다. 내가 섬긴 범 씨와 중항씨는 모두 나를 보통 사람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백은 나를 선비로 여겼으니, 나도 마땅히 선비로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다(國士遇之國士報之)"
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조양자는 예양의 충의에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예자(豫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절을 다한 명예는 이미 이루어졌고, 내가 그대를 용서함도 충분하였으니 응당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으리라"
며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포위했다. 그러자 예양은
"당신은 신(臣)을 이미 관대히 용서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어짊을 칭송한다. 이제 죽어 마땅하나 당신의 옷이라도 벨 수 있게 해 주길 청한다"
고 하였다. 이에 조양자가 겉옷을 벗어 바닥에 놓아 그의 옷을 벨 기회를 주자, 세 번 뛰어 그 옷을 베고난 후,
"내가 비로소 지하에 계신 지백께 보답할 수 있게 되었노라!"
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예양이 죽자 삼진의 식자들은 애통해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기록에 따르면 조양자는 8년 후에 죽었다. 한편 열국지에선 위에 언급한 다리의 이름을 조양자가 예양을 기리기 위해 '예양교'라고 붙였다는 내용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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