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숙(漢文學塾)/碑文踏査

안동진주강씨양진당 공목강공 유적비(해설)

주비세상 2022. 6. 2. 12:59

高麗門下贊成事晉山君諡恭穆姜公遺蹟碑 銘幷序

安東通國之雄府也粤自王麗神宗1)時置大都護府歷玆府者多名公鉅卿2)而恭穆姜公諱蓍乃其一也公晉陽之望族3)先世多以儒而顯至監察御史師瞻4)版圖正郞昌貴5)鳳山君文敬公君寶6)三世皆仕于乃其曾祖祖若考也公以忠肅王7)己卯臘月廿二日生以蔭補8)延陵直年八歲十九中丁酉成均試壬寅大官署丞再遷郞將兼監察糾正歷典工佐郞廣興倉使治繁處劇9)所至稱職爲閤門引進副使禮容中度10)加朝列大夫出陜州政績以著典法版圖典理皆爲摠郞中顯尹衛尉中正三司左尹奉順判軍器戊午出按江陵道己未通憲判繕工加奉翊庚申出爲安東大都護府使文敬沒期起復11)左常侍壬戌轉版圖判書無何爲密直副使俄賜端誠輔理功臣號冬遷匡靖大夫判厚德府事兼判典醫寺事上護軍癸亥春拜門下評理商議冬封晉山君重大匡庚午夏匡靖大夫判慈惠府事上護軍同判都評議使司事冬加授推忠輔祚功臣大匡商議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繕工寺事左右衛上護軍時大夫人金氏尙無恙12)公之兄弟公之子淮伯相繼入相府13)世人榮之壬申遭母憂三年廬墓14)秋麗社屋15)粤八年庚辰十一月廿六日沒春秋16)六十有六二訃聞命有司庇喪事贈諡恭穆明年三月甲寅葬于長湍羅浮里負酉之原17)配貞愼宅主晉州河氏晉川君元正公松軒楫之女公天性恪謹風采嚴重律己以勤守官以愼持法不阿名實茂著矣往在丙辰春后孫之居安東者齊會暎湖樓曰維玆之府吾祖之所甞莅也巖臺草樹剩馥歷久而猶有未盡泯焉者盍竪一石庸標遺躅18)相地19)於樓南之水上洞經之七年克底于績20)大黙21)之勞居多昌佑21)擔其更與信赫21)來責銘於不佞家源22)家源就据權陽村近23)所撰墓誌暨胤采24)所述行蹟而爲之蓋公之莅玆府在禑王25)六年當時麗運恃26)其西倭寇27)其南公之蒿目風塵罄忱28)爲國之事可以想像於六百載之矣銘曰

維玆福州國之雄府凡莅玆者材兼文武不才莫任匪德曷撫史民孱儁風俗良楛于是譚何容易憲憲恭穆淸明爲吏時維王麗悲運是爲之尤難不堪愁顇29)王曰汝著往哉其治公拜稽首30)載疾南馳守法公平府民温慈秉直不阿乃公之持淸洛之滸名樓之南爰有一洞遺蹟是探是公所憩草樹如藍曠六百禩馥播恩涵乃琢蜿蜒31)螭雲霞32)增色人神胥夷33)爾慈孫感慨曷涯我銘菲惻34)過者讀之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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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釋>

1)王麗神宗왕려신종:고려 20대 신종왕

2)名公鉅卿명공거경:이름 높은 재상

3)望族망족:명문거족

4)師瞻사첨:공목공의 증조부

5)昌貴창귀:공목공의 조부

6)君寶군보:공목공의 부친

7)忠肅王충숙왕:고려 27대왕

8)蔭補음보:조상의 음덕

9)治繁處劇치번처극:번거로움을 다스리고 어려움을 처리하다.

10)禮容中度예용중도:禮儀와 용모가 法度에 맞다.

11)起復기복: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감.

12)無恙무강:병이나 탈이 없음.

13)相府상부:재상의 관사

14)廬墓여묘:시묘살이

15)秋麗社屋추려사옥: 高麗社稷이 무너지다.

16)春秋춘추:나이

17)之原부유지원:유좌(酉坐:정 서쪽을 등진 묘 자리)의 언덕에 묻다.

18)庸標遺용표유촉:남은 자취에 표시함.

19)相地상지:풍수지리에서, 땅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

20)克底于績극저우적:사업을 잘 마쳤다.

21)大黙,昌佑,信赫(대묵,창우,신혁):유적비 건립에 힘쓴 후손 이름.

22)不佞家源(불녕,가원):불녕은 작자 자신의 겸칭.가원은 공적비를 쓴 작가 이름.

23)權陽村近권양촌근: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권근, 호는 양촌(陽村).

24)胤采윤채:밀양인 박윤채

25)禑王우왕:고려 제32대 국왕

26):원나라

27)倭寇왜구:일본 해적

28)蒿目호목:근심스러운 눈으로 보다.

風塵풍진:난리로 어지러운 세상.

罄忱경침:정성을 다하다.

29)愁顇수췌:근심과 야윔

30)稽首계수:머리를 조아림

31)蜿蜒완구:(좌대)의 꿈틀거림.

32)其螭雲霞기리운하:그 이수(용두석)의 구름 안개.

33)胥夷서이:서로 기뻐하다.

34)菲惻비측:간절함이 박하나, 잘 못 지었으나.

 

 

(한자풀이) :다스릴 리. :조정(朝廷) . :및 약. :벼슬줄 배. :이를 천. :주관할,다스릴지. :갑자기,잠시 아. :품계 계. :및 기. :겨우 재. :,겨우 보. :1년 기. :배젓는 노 즙. :만할 민. :자취 촉. :모두 함. :엿볼 틈. :거칠,미친개약탈할 제. :다할 흘. :아래로. 잔약할 잔. 준걸,뛰어날 준. 참으로 량. 거칠 고. ,다스릴 계. 다스릴 치. 높을 궁. 하물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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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고려문하찬성사진산군시공목강공유적비 명병서

안동은 온 나라 가운데 웅대한 고을이다. 고려 신종 때부터 대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이 고을의 원(·사또)을 지낸 분은 모두 명공거경(名公鉅卿)이었으니 공목 강공 휘 시()는 그중에 한 분이었다.

공은 진양의 망족(望族)으로 유학자로 현달한 분이 많았으니, 감찰어사 휘 사첨(師瞻)과 판도정랑 휘 창귀(昌貴), 봉산군 문경공 휘 군보(君寶), 3세에 걸쳐 고려조에 벼슬하였으니 이는 공의 증조부, 조부, 부친이시다.

공은 충숙왕 기묘(서기1339) 1223일에 태어나시어 음덕으로 정릉직에 보직되었는데 나이 겨우 8세였다. 19세에 정유(공민왕6. 서기1357)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공민왕11)에 대관서승에 임명되어, 다시 낭장 겸 감찰두정에 옮기었으며, 그 후 전공좌랑 광흥창사를 역임하여, 번거로움을 다스리고 어려움을 처리하여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니 칭찬이 많았다.

합문인진부사로 있으면서 례의와 용모가 법도에 맞으니, 조렬대부에 가자(加資)되었고 합주고을 원()으로 나가 정적(政績)을 드러내었다.

전법 전리총랑을 두루 역임하고, 중현대부윤위위 중정대부 삼사좌윤 봉순대부판군기를 거쳐, 무오 년(우왕4년 서기1378)에 강릉도의 안찰사로 나갔다가, 기미에 통헌대부판선공으로 옮기고, 조금 후에 봉익대부에 가자(加資)되었으며, 경신 년(우왕6년 서기1380)에 외직으로 나가,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는데 문경공께서 돌아가심에 상을 마치고, 다시 좌상시에 임명되어 임술 년에 판도판서에 옮기고 다시 밀직부사가 되었다.

조금 후에 단성보리공신의 호를 하사받고 그해 겨울에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겸 판전의사사상호군에 옮기었고, 계해 년 봄에 문하평리상의에 임명되고, 겨울에 진산군에 봉하여 중대광의 품계에 올랐다.

공양왕 경오 년 여름에,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 판도평의사가 되고 겨울에 추충보조공신대광상의 문하찬성사 동 판도평의사사 겸 판선공사사 좌우위상호군이 되었다.

이때 대부인 김() 씨가 오히려 무병하신지라. 공의 형제 및 공의 아들 회백(淮伯)이 서로 이어 상부(相府)에 들어가니, 세상 사람들이 영화롭다 하였다.

임신 년(조선 태조원년 서기1392)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侍墓)살이 하고, 고려의 사직이 무너진 8년 후, 정종 경진 년(서기1400) 1126일에 돌아가시니, 춘추 62세였다.

부음이 들림에 나라에서 유사를 명하여 상사를 돕게 하고 공목의 시호를 내렸다.

명년 3월 갑인 일에, 장단 나부리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정신댁주 진주 하()씨니 진주군 즙()의 딸이다.

공은 천성이 각동(恪動)하고, 풍채가 엄중하여 근실하게 몸을 닦고, 삼가하며 벼슬을 지켰으며, 법을 좇아 아부하지 않음에, 그 명망이 드러났었다.

지난 병진 년(서기1976) 봄에, 안동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영호루에 모여 모두 말하기를, 오직 이 고을은 우리 선조께서 일찍 다스렸던 곳으로 암대와 초수까지도 더욱 향기로워 오랜 세월을 지난 오늘날에도 오히려 다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 추모의 정이 다하지 않음이 있는지라, 대게 한 돌을 세워 유촉(遺躅)에 표시하고자, 루의 남쪽 수상동에 자리를 잡아 7년을 지내어 드디어 일을 마쳤는데, 대묵(大黙)의 노고가 가장 많았으며, 창우(昌佑)가 그 비석건립을 담당하였고, 다시 신혁(信赫)과 함께 와서 불녕(不佞:작자의 겸칭) 가원(家源)에게 청하여, 가원이 이에 곧,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묘비명 및 윤채(胤采)가 기술한 행적을 근거하여 이 글을 짓는다. 대개 공께서 이 고을에 부임한 것은, 고려 우왕 6년 경신(서기1380)년의 일로 당시에 고려의 운이 다하여, 원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서방을 엿보고, 왜구는 우리나라의 남방을 약탈하는 때였다.

공이 이렇게 어지러운 국운을 근심 눈으로 보며, 온 정성을 다 하여 나라를 위해 애썼던 사실은 6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가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도다.

()하노니,

오직 이 안동 고을은 나라의 웅부였으니 무릇 이 고을을 다스린 이는 재주가 문무를 겸전한 분이었다.

재주 없는 이는 맡기질 않았고, 덕화(德化)가 아니면 어떻게 다스렸겠는가.

백성들이 잔약영악하고 풍속이 참으로 거칠었으니, 실로 이곳을 다스림에 어찌 용이하다 말하겠는가?

훌륭하신 공목공이시여!

청명하신 관리였는데, 때는 고려 말로 비운을 만난 지라, 다스리기 더욱 어렵고 근심을 견디지 못하여, 왕께서

너 시(공목공의 휘자)에게 이르노니 어서 가서 그 고을을 다스려라

하니 공께서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고 내려와서 길을 재촉하여 남쪽으로 달려가,

법을 지켜 공평하고 백성 다스림에 온화하고 사랑하며 곧게 하며 아부하지 않으시니,

이는 공의 지조였다.

맑은 낙동강 변 이름난 영호루 남쪽의 한 동리가 있어,

유적을 더듬으니, 이곳은 공의 휴식하던 곳으로, 풀 나무 똑같이 푸르도다.

어느덧 6백년 긴 세월, 그 향기 퍼지고 은혜로 적셔주시네.

이에 높은 비석 다듬어 세우니, 거북좌대 꿈틀거리고 이수(螭首:용두석)의 구름 안개 더욱 아름답도다.

인신(人神)이 서로 기뻐하니, 하물며 그 자손 된 사람이랴!

감개가 다함이 없도다.

나의 글()은 간절하지는 못하나 지나는 분들이 읽으리라.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경찬

 

<출처>http://www.jinjukang.org/im/technote/

read.cgi?board=201908&y_number=5&nne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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