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숙(漢文學塾)/한문반행사

영덕문화탐방자료(2013. 10. 28)

주비세상 2013. 10. 29. 14:06

 

 

 

 

 

영덕 문화 탐방 자료

 

대구달서노인복지관한문반

 

2013. 10. 28

 

 

1. 괴시리 전통마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전통 마을은 목은 이색 선생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전통 고가옥 30여동이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5호인 영양남씨 괴시파종택을 비롯해서 문화재자료16점이 있다.

 이 마을 앞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 이라 부르다가 고려 말 대문호 목은 이색선생(1328~1396)이 문장으로써 원 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歐陽博士)구양현(歐陽玄)의 괴시 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효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한다.

고려말에 함창 김씨(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하였고 그후 조선 명종(明宗:1545~1567)년간에는 수안 김씨(邃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 인조 8년(1630)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시거(始居)하였다.그후 3성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남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전체 100여 호에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30여 호가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주민 역시 100여 명이 영양남씨다. 마을 앞에는 동해안의 3대 평야 가운데 하나인 영해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어, 이 마을이 예부터 세도가들의 터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양남씨 괴시파종택)

1700년경 남붕익께서 건축한 고가로 조선후기 주택의 소박한 격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이며 괴시마을 공간구성에서 핵심적인 건물이다.(민속자료 제75호)

(괴시동 대남댁)

이건물은 1766년에 남준형께서 영해면 괴시리에 건립한 가옥으로 1911년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괴시리마을 입구자형(口)주택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집이다. (문화재자료 제197호)

(괴시동 물소와고택)

괴시리 마을의 입구자형(口) 주택중에서 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남유진께서 지은 집으로 이후 한차례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고택은 정면 5칸 반의 규모로 정침, 중문, 사랑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문화재자료 제198호)

(괴시동 예촌고택)

1775년 해촌 남극만께서 건축하여 1878년 한차례 중수한 건물이다. 입구자형() 목조로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7칸이다.(문화재자료 제199호)

(영덕 천전댁)

19세기 전반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된 입구자형(口) 목조이며, 속칭 날개집 유형에 속한다.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378호)

(영해 입천정)

1860년경에 남붕익선생께서 2~3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나 무너지고 1888년에 현재의 규모로 다시 세운 정자로 괴시마을 내서당의 위치와 함께 마을을 구성하는 중요한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392호)

(영해 주곡댁)

1800년대 초에 건립한 정면5칸, 측면6칸, 규모의 가옥으로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남경괄의 처가인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를 따서 주곡댁이라 한다.(문화재자료 제393호)

(물소와 서당)

이 서당은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선생게서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의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850년경에 건립한 한일자형(一) 정면3칸, 측면1칸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294호)

(영해 경주댁)

이 건물은 당초 수안김씨가 살았던 주택으로 전하며 괴시마을에서 천전택과 더불어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주택의 하나로, 대문채과 입구자형(口) 안채로 구분되어 있다.(문화재자료 제395호)

(영해 구계댁)

이 건물은 졸헌 남경악께서 1850년경에 건립한 정면5칸, 측면6칸의 입구자형(口) 건물이다.(문화재자료 제396호)

(괴시리 괴정)

이 건물은 조선 명조42년(1766년)에 괴정 남준형공께서 건립 하였으며, 6.25전쟁 후에는 야학의 학당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문화재자료 제397호)

(괴시리 영감댁) (괴시리 사곡댁) (영덕 괴시리 영은고택)

 

2. 삼사해상공원

이북 5도민의 망향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95년도에 세워진 망향탑과 경북개도 100주년 기념사업인 경북대종, 어촌민속전시관, 공연장과 폭포 기타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매년 새해 해맞이축제가 열리며,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지역음악동호회가 참여하는 관광명소 주말공연이 열리고 있다.

 

3. 영덕풍력발전단지

 

영덕읍 창포리 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어 사계절 바람이 많은 것에 착안하여 미래의 대체에너지사업으로 가장 친환경적인 청정에너지에 주안점을 두고 풍력발전기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2005년 운전 개시. 풍력발전기 24기, 96,680MWh/년간 (약 2만가구 이용량)

 

 

4. 목은 이색 선생 기념관

 

이색(李穡)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정(文靖). 1341년 진사가 되고, 1348년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으로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 부친상으로 귀국, 1352년 공민왕에게 전제(田制) 개혁`국방 강화`교육 진흥`불교 억제 등 당면 정책을 건의했다.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해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했다. 이후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했고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일등공신이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아들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 유배됐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훗날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권근.이숭인.길재.하륜.정도전.김종직.변계량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문장의 조종' 이란 칭송을 받을만큼 시인이자 대문호였던 그는 고려 말기의 학문과 정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서에 <목은시고>와 <목은문고>가 있다.

   詠雪

松山蒼翠暮雲黃

飛雪初來已夕陽

入夜不知晴了未

曉來銀海冷搖光

송악산 푸르름에 저녁 구름 물들더니

눈발 흩날리자 이미 해는 저물었네.

밤들면 혹시나 이 눈이 그치려나

새벽엔 은 바다에 눈빛이 차갑겠지.

 

 

4. 나옹선사(懶翁禪師)

 

공민왕의 왕사이며.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휘는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본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牙)씨인데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고려말 고승으로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했다.

조선 태조 왕사로서 한양천도의 주요 인물인 무학대사는 그의 제자였다. 나옹, 지공, 무학, 세분의 부도와 비석이 회암사터의 뒤쪽에 현존하고 있는데, 비석은 조선왕조 유학사상의 지주였던 목은 이색이 찬하여 지금도 비문이 남아있다.

그 출생지 부근에 장륙사라는 조그만 사찰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 건물과 건물 내벽에 그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그가 입적한 남한강변 여주 신륵사에도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비문이 남아 있다.

懶翁禪師

禪詩

靑山見我無語居

蒼空視我無埃生

貪慾離脫怒抛棄

水如風居歸天命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5. 신돌석 장군 유적지

 

신돌석장군 유적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도곡리에 있는 한말의 의병장 신돌석(申乭石:1878∼1908)의 유적지이다.1999년 11월 18일 개관하였다. 의병장 신돌석의 우국충정을 기념하고 항일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설립하였으며, 신돌석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종합적으로 수집·보존하여 전시하고 있다. 태백산 호랑이로 일컬어지던 신돌석은 한말의 대표적 평민 의병장으로, 경상남독도·경상북도·강원도·충청도 등지에서 탁월한 유격전으로 용맹을 떨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신돌석이 태어난 생가로부터 2.3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지 약 1만 6000㎡ 규모에 사당인 충의사를 비롯해 동재·서재·외삼문·내삼문·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고, 기념관 앞마당에는 의병대장신공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憂國

登樓遊子却行路

可歎檀墟落木橫

男子二七成何事

暫倚秋風感慨生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어,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폐허를 탄식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잠시 추풍 속에 앉아 감회에 젖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