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자료는 소학반 청담 김진교 선생님께서 제공하셨습니다.
맹자,순자,고자,묵자의 사상철학
중국 고대의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했던 많은 제자백가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제자(諸子)란 말은 여러 선생이란 뜻이고, 백가란 수많은 파별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상가들 중에서 공자의 제자였지만 性善說을 주장한 孟子, 性惡說을 주장했던 유가철학자 荀子, 性無善惡說을 주장한 告子,兼愛思想을 바탕으로 크게 발전했던 묵가학파의 墨子에 대해서 살펴보자.
1.맹자(孟子)
〇 BC 371경 중국의 고대 추(鄒)나라~ BC 289경 중국. 중국의 고대 철학자.
〇 槪要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맹자 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〇 生涯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〇 性善說
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 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언제나 주요사상가로 여겨져왔지만 특히 송대(960~1279)의 성리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00년 동안 맹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교의 공동창시자(공자와 함께)로 숭배되어왔으며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2.순자(荀子)
〇 槪要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38년?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 말기의
유가 사상가이자 학자로,[1] 이름은 순황(荀況)이다. 전한 선제의 이름이 비슷하였고, 이를 피하기를 위해서
손황(孫況)이라고도 불렀다. 경칭으로 순경(荀卿) 또는 손경자(孫卿子)로도 불린다.
〇 生涯
15세 때 처음으로 제나라에서 삼도좨주라는 벼슬을 했으나, 모함을 받고 물러나 초나라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진(秦)에 의한 전국통일(기원전 221년) 전야(前夜)의 사상계에서 활약했으며, 초(楚)나라에서 정치 실무를 담당
한 일도 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는 천(天)의 사상을 발전시킨 자사(子思)나 맹자와는 다른 예(禮)에 뛰어났던
유교 계통에 속한다. 맹자 등의 유교사상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전국시대의 다른 학파의
사상까지 비판·섭취하여 유교로서는 상당히 특이한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순자(荀子)는 그의 저술이라고 하며, '천론(天論)'·'예론(禮論)'·'성악(性惡)' 등의 여러 편 외에 그의 제자나 그 의 관계되는 것이 들어 있다.
〇 性惡說
순자의 사상에서 바탕이 된 것은 예를 지상(至上)의 것으로 한다는 태도이다. 공자는 있는 그대로의 종교의례·제도·관습을 예로 삼아 성인(聖人) 주공(周公)에 의해서 집대성된 중국인의 전통적 문화유산으로서 신뢰하고 존중했다. 예는 공자의 경우 아직 덕목(德目)은 되지 못했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는 공자의 이러한 태도를 지지한다. 그도 예는 성인(聖人)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으로 영원히, 즉 시대의 제약을 초월하여 무한하게 타당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상고(上古)의 성왕(聖王) 업적은 시대가 오래되므로 전승(傳承)이 완전하지 못하여 후세 사람으로는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상고의 성왕, 즉 '선왕(先王)'이 만든 예는 후세의 왕, 즉 '후왕(後王)'의 업적을 보고 추정해야 한다고 하여 예를 생각하는 기준을 동시대로 옮겨버린다. 그리고 공자처럼 예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순자는 후왕이 예의 내용에 새로 추가하는 요소인 법률에도 성왕의 예와 같은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사상에서 그는 공자 이후의 덕치주의(德治主義) 전통에 새로 법치주의의 요소를 추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3.고자(告子)
〇 槪要
출생-사망: ? ~ ?
본 명: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국 적: 중국 제(齊)
활동 분야: 철학 (性無善惡說을 주장함)
〇 生涯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맹자(孟子: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일찍이 맹자(孟子)에게 배웠는데, 묵자(墨子)의 가르침을 받았다. 인성(人性)에 관하여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〇 性無善惡說
고자는 인간의 본성에는 선도 악도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선과 불선(不善)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은 마치 물이 동서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가 이 말을 인용하여 "성은 선해질 수 있고 불선해질 수도 있다."고 한 것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D. 에라스무스가 인간이 태어났을 때는 완성되지 않은 밀납과 같다고 한 것이나, J. 로크가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다고 한 말은 인간의 마음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4.묵자(墨子)
〇 槪要
출생 - 사망 480 추정 ~ BC 390 추정
전국 시대 초기 노(노)나라 사람. 일설에는 송(송宋)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이름이 적(적)이다. 묵가(묵가)의 창시자로, 일찍이
송나라의 대부(대부)를 지냈다. 노나라 양문군(陽文君)이 정(鄭)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했다. 또 공수반(公輸般)을 설득해서 초(楚)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도 막았다. 처음에는 유자(儒者)의 학문을 배우고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익혔지만, 나중에 새로운 학설을
세우면서 무리를 모아 강학하니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했다. 유가와 대립하면서 유묵현학(儒墨顯學)으로 병칭되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세상을 위해 일할 것을 강조했다. 유가의 번례후장(繁禮厚葬)을 반대했다.
〇 兼愛思想
묵자사상 계통에서 겸애사상은 유가계통의 별사상(別思想)과의 구별에서 뚜렷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묵가(墨家)는 겸(兼)을 주장하나 유가는 별을 주장한다고 묵자계통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별을 주장하는 선비는 자신을 위하는 만큼 벗을 위하고, 나의 어버이를 위하는 만큼 벗의 어버이를 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겸애를 주장하는 선비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만큼 벗을 위하고, 자기 어버이를 위하는 만큼 벗의 어버이를 위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대비는 묵자계통에서 말한 것이다.
별과 겸의 두 원리 가운데서 묵자는 자신의 겸애설이 진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제창하는 겸애설이 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더 맞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대국의 소국에 대한 침략, 큰 집안의 작은 집안에 대한 교란, 강자가 약자에 가하는 핍박,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 귀한 신분이 천한 신분에게 가하는 멸시 등 이런 일들은 사회의 병폐이다. 이런 병폐는 남을 미워하고 남과 자기에 대해 차이와 구별을 두는 데서 생겼다.
즉, 겸애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별에서 왔다. 모든 사람이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 위하듯이 하면 남의 나라를 공격할 수도 없고, 남의 도성(都城)을 자기 도성처럼 생각하면 남의 도성을 정벌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을 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하는 일과 같은 것이 된다. 겸애사상을 가지게 되면 국가는 서로 싸우지 않게 되고 사람들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겸애정신은 천하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고 천하에 분명히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러한 이익은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보아야 한다. 즉, 천하의 모든 이익과 화평은 겸애하는 데서 시발한다고 묵자는 강조하였다.
이처럼 묵자는 공리주의적 논변을 통해 겸애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논증해 보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천하의 이익을 추구하고 천하의 손해를 제거하며 어진사람[仁人]은 자신과 천하의 모든 사람을 위해 겸애를 행동의 기준으로 세워야 한다고 본다.
묵자는 이 기준에 따라 행동하면 총명한 이목(耳目)은 서로 감응하여 보고 듣고, 팔다리는 강하여 작용할 것이며,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싫증내지 않고 남을 일깨워 줄 것이고, 늙어 처자가 없는 사람도 대접과 봉양을 받아 수명을 누릴 것이며, 부모 없는 어린 고아들도 의지할 곳이 생겨 그 몸을 키우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묵자는 겸애를 기준으로 삼으면 이익은 결과적으로 따라오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겸애설은 묵자의 이상세계로서, 그는 오직 겸애사상에 의해서만 이상세계가 전개된다고 여긴다.
한국철학사에서는 묵자의 사상이 큰 진전을 보지 못했고, 중국에서도 불교나 도교만큼 그렇게 역사적으로 큰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그 까닭은 유가의 비평처럼 묵가의 겸애설이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관념적 이상주의만을 내세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가적인 시각에서 풀이하면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인(仁)인데, 사람의 사랑이 그냥 추상적인 보편성에 의해 똑같이 겸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위와 가까운 데서부터 사랑이 싹터서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묵자의 겸애설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사랑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묵자는 자신의 겸애설이 현실적으로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겸애가 곧 하늘의 뜻이라는 천지사상(天志思想)을 펴면서 유가사상보다 훨씬 강한 종교적 성향을 풍기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천지를 거스르는 자는 천벌을 받고 겸애를 행하는 자에게는 하늘과 귀신도 상을 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공자,맹자,순자,노자,장자의 생애
1.공자의 생애공자는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현재의 山東省)에서 하급무사 숙량흘(叔梁紇)과 그의 내연(內緣)의 아내 안징재(顔徵在)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힘이 세었으며 제(齊)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공자가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공자는 창고지기며 목부(牧夫) 노릇을 하면서 학문에 힘썼기 때문에 정해진 스승은 없었다. 당시의 천하(天下)는 하극상(下剋上)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제후(諸侯)들은 주(周)나라의 권위를 업신여겼고, 제후국(諸侯國)에서는 중신(重臣)이 주군(主君)을 능멸했다. 노나라에서는 대부(大夫)인 3환(三桓;季孫·叔孫·孟孫)이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노나라의 임금 소공(昭公)은 3환의 전횡(專橫)에 분노하여 무력으로 이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실패,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36세에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43세 때 정공(定公)이 즉위하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자로(子路)·민자건(閔子騫) 등의 제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명성이 높아졌으며, 52세에 중도(中都)의 재(宰;守令)가 되었다. 53세 되던 해에 협곡(夾谷;山東省)에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화평회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임금은 폭력으로 노나라 임금을 협박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나라 임금을 수행하고 있었던 공자가 제나라 임금을 질타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54세에 노나라의 대사구(大司寇;法務大臣)가 되었으며, 다음해 3환의 세력을 없애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14년간 조(曹)·위(衛)·송(宋)·정(鄭)·진(陳)·채(蔡)·초(楚) 등의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공자의 의도는 자신의 이상(理想)정치를 실시해 줄 군주(君主)를 찾는 것이었지만 어느 곳에 가도 채용되지 않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상해(傷害)를 당하고, 굶주리기도 하였다. 69세에 노나라로 돌아온 뒤 정계(政界)에의 기대를 버리고 제자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제자는 3000명에 이르며, 그 중 <6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 공자에 의하면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염백우·염중궁,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가 뛰어났다. 이들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한다.
2.맹자의 생애맹자는 BC 4세기 전반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이야기로 맹모삼천(孟母三遷)이나 단기지계(斷機之戒)의 가르침이 있다. 젊었을 때 노 (魯)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孔伋)의 문하생에게 배웠다. 뒤에 제자들을 이끌고, <후거수십승(後車數十乘), 종자수백인(從者數百人)>이라는 대부대를 이루어 양(梁;魏)나라 혜왕(惠王), 제(齊)나라 선왕(宣王), 추(鄒)나라 목공(穆公), 등(謄)나라 문공(文公) 등에게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들을 지도했다. 사상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유력한 제후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무력으로 타국을 귀속시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들의 목표는 춘추시대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맹자는 그의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제후에게 유세하고 다니면서 인의(仁義)를 무시하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다스리는 일을 부정하고 임금이 어진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왕도(王道)를 제창했다. 힘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패도로는 인심을 장악할 수 없으며, 인애(仁愛)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군대나 영토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민심의 장악이야말로 통치의 요체(要諦)라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다. 이 왕도론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이어서 결국 사용되지 못했다. 맹자의 민심파악 중시사상은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긍정이라는 과격한 형태로도 나타났다. 또 왕도정치의 일환으로서 그가 제창한 정전법(井田法)도 유명하다. 정전법이란 전답을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을 조세용 공전으로 하고, 그 주위를 균등하게 배분한다는 것인데, 토지제도 이념으로서 그 뒤에 오래도록 사용되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사덕 (四德)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사단(四端) 즉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씨로 나타난다. 사람은 이 사단을 확대하여 마음의 선성(善性)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유명한 성선설(性善說)이다. 그의 이 주장은 약 50년 후배인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아울러 오랫동안 인성설의 두 전형이 되었다. 맹자 시대는 유세가(遊說家)가 활약했던 시대였다.
특히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臨淄)에는 유세가가 많이 모여, 그 성황을 <직하(稷下)의 학(學)>이라 했다. 맹자도 이 직하(임치)에서 논진(論陣)을 편 일이 있었으나, 다른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논쟁을 했다. 맹자가 가졌던 일련의 논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성(性)에 대한 선악을 말할 수 없다는 고자(告子)와의 응수이다. 또 차별없는 사랑을 주장한 묵적의 겸애설(兼愛設), 철저한 이기주의를 주장한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設)을 모두 극단적인 이론이라 하여 물리치고, 가족윤리를 기둥으로 차츰 남에게 파급시키는 인의(仁義)를 주장했다.
3.순자의 생애BC 3세기경의 중국 사상가. 이름은 황(況). 조(趙)나라 사람으로, 50세 무렵에 제(齊)나라에서 유세(遊說)하여, 직하(稷下)에 모였던 학자들 사이에서 장로(長老)로 존경받있다. 그러나 모략으로 인해 초(楚)나라로 옮긴 후 춘신군(春申君)에 의해 등용되어 난릉(蘭陵;현재의 山東省 남부)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BC 238년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난릉에서 여생을 마쳤다. 순자는 공자(孔子)·맹자(孟子)를 잇는 유가(儒家)로, 《순자》 20권 32편의 저작이 남아 있다. 그의 중심사상은 끊임없는 노력을 중시하며, 노력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고에서 맹자의 성선설에 대치되는 성악설이 나왔다. 그는 사람의 본성은 악(惡)하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는, 재해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였는데, 인간의 후천적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는 이를 부정하였다. 또한 고대의 신화적 천자, 즉 선왕(先王)을 군주의 이상형으로 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여, 현재의 정치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현실에 노력한 왕, 즉 후왕(後王)이 정한 정책이나 제도에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후왕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 및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의 주장은,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는 이단시되어 오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4.노자의 생애<인물>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字)는 담(聃), 춘추시대에 초나라의 고현(苦縣)에서 태어났다. 주(周)나라 왕실의 수장실리(守藏室吏;도서 관리인)를 지냈다. 공자가 방문하여 예(禮)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은거를 결심하고 서쪽으로 여행하는 도중, 관문에서 관문지기 관윤희(關尹喜)의 청에 의해 상하 2편의 책을 저술한 후 떠났는데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고, 그것을 전하는 가장 오랜 자료 《사기(史記)》의 <노자전>에서도 의문을 표명하고 있어, 공자의 선배로서 BC 6세기에 활약한 인물이라는 실재성은 희박하다. 오늘날의 학설로서는 BC 479년에 죽은 공자보다 100년 정도 후배라는 설과, 가공의 인물로서 실재하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 현존하는 책과 결부시켜 생각하면 춘추전국시대의 중기(BC 4세기)보다 올라갈 수는 없다.
<서적>《노자》 2편은 《도덕경》이라고도 불린다. 상편이 <도(道)>자로 시작되므로 도경, 하편이<덕(德)>자로 시작되므로 덕경, 즉 이들을 합친 명칭이나, 유교의 도덕과는 달리 우주인생의 근원과 그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내용은 약 5000자. 현재는 81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것이 최초의 형태는 아니다. 문장은 간결한 격언적 표현의 집적으로 대구(封句)와 각운(脚韻)을 많이 썼고 의표를 찌르는 역설적인 말이 특색이다. 민간에 널리 구전되어 온 속담과 격언을 모은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이야기와 함께 비유적인 난해한 어구도 많고 고래의 해석에도 이설(異說)이 많다. 완성된 것은 전국시대 말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주석(註釋)의 수는 대단히 많지만 위(魏)나라 왕필(王弼)의 주가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무(無)의 철학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상공(河上公)의 주는 치신치국(治身治國)의 현실적 해석 외에 양생(養生)에 관계하는 신선도교(神仙道敎)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고주(古註)의 대표적인 것이다. <사상>《노자》사상의 중심은 개인적 또는 정치적인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무위(無爲)>의 술(術)에 대해 논하고, 이를 위한 근거로서 형이상학적 근원인 <도(道)>를 논하는 것이었다. 우선 <도>란 <이것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이것을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며… 혼합하여 하나가 된다>와 같이 감각을 초월한 하나의 것으로 천지만물의 존재에 앞서 독립자존하며 그 위에 큰 현실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즉,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와 같이 만물생성의 근원으로서 <천하의 어머니>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존재는 모두 <도>에 의해서 각각 본연의 자세를 수행한다. 그래서 만물은 <도>에 따라 있는 그대로(자연 그대로) 있지만, 인간은 사욕(私慾)으로 인해 종종 <도>를 벗어난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다. 그래서 <단지 도만을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약은 꾀를 버리고 고의적 소행을 피하는 <무위(無爲)>의 입장에 몸을 놓고 <무욕(無慾)>이 되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말고, 약하게,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 좋다. <무위이면서 무위함이 없다> 즉, <무위>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도>의 큰 활동은 그 활동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자연 본연의 모습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모범으로 하여 <도>의 절대세계에 <복귀>하라는 사상이다. 《노자》의 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된다. 단 노자의 현실적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장자의 관념적·사변적인 철학과는 차이가 있다.
5.장자의 생애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또는 장자가 저술한 저서 《장자》를 가리킨다. <인물>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나라의 몽(蒙;河南省 商邱縣) 출신. 전국시대인 BC 300년 무렵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칠원(漆園)의 말단관리가 된 적이 있을 뿐 대개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논리학파(論理學派)의 혜시(惠施)와 친하게 교유했지만 그 밖의 행적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 보통 그를 가리켜 노자(老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대성시킨 사람이라고 하여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라고 일컫기도 하나, 노자의 사적(事績)과 연대(年代)가 애매하다는 사실과 두 사상의 차이 등에서 그 전후관계에는 의문점이 많다. 노자의 현실적인 성공주의와는 달리 장자에서는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自己中心說)과 전병(田騈)의 귀제설(貴齊說;萬物平等說)의 영향을 받은 사변적 경향이 강하다. <서적>《장자》는 33편으로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나뉜다. 그 가운데에서 내편이 장주(莊周)의 근본사상을 기술한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내편의 뜻을 부연한 것으로서 그의 후학들이 연구발전시킨 것이라 하며, 노자와의 절충이나 다른 사상과의 교류 등을 엿볼 수 있다. 대략 전국시대 말기(BC 3세기 말)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문(原文)의 분합(分合)은 그 뒤에도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33편으로 정착된 것은 진(晉)나라 곽상(郭象)의 주석본이 나온 이후의 일이다. 곽상의 주석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본(完本)의 기본자료이며, 그 뒤에도 당(唐)나라 성현영(成玄英)의《주소(註疏)》와 송나라 임희일(林希逸)의 《구의(口義)》등 많은 주석본이 나왔다. <제공:처암 김진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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