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 공목공묘비명
恭穆公墓碑銘
建文1)二年庚辰冬晉陽姜公淮伯以其先子2)恭穆公行歷來徵予墓碑之文曰吾先子律己以勤守官以愼名實茂著而可傳者苟不於金石焉鑱之是吾爲不子矣因投杖稽桑而泣請餘以附葭3)知公父子久義不辭謹按公諱蓍字某晉陽之望族4)也五代祖國子傳士諱啓庸其子殿中内給事諱引文皆以儒顯初博士爲日本通信使書狀官给事從行及至元東征5)之役以給事曾知道里又舉爲書狀官風濤險艱且因兵交6)濒於死者屢矣及還不復仕戒子孫曰吾非文士不至歷險至此爾輩無復業儒也故其子監察御史諱師瞻孫版圖正郞諱昌貴皆仕于吏正郎後贈門下侍中晉原府院君即公之祖也鳳山君諡文敬諱君寶即公之考也文敬性敏好學晉原亦以儒術7)爲先世家業許令登科遂爲儒位至宰輔以興其家叮給事之戒特懲於一時之困爾東征之士葬魚腹而不返者何恨是豈儒哉晉原之戒其子文敬之興其家天殆啓之以雪其恨而昌其慶也歟文敬娶鷄林金氏典客令呂珍之女以後至元己卯冬十有二月二十二日生公至正丙戊公年八歲以門蔭8)補延陵直十九中丁酉成均試壬寅拜大官署承再遷郎將兼監察糾正荐歷典工左郎廣興倉使治繁處劇所至稱職爲閤門引進副使禮容中度加朝列大夫出知陜川政績以著典法版圖典理皆爲總郎中顯尹衛尉中正三司左尹奉順判軍器出按江陵道是洪武戊午秋冬也明年己未通憲判繕工俄加奉翊又明年出爲安東大都護府使文敬考終丁憂9)甫及期起復10)左常侍壬戌轉版園版書未幾入密直爲副使俄賜端誠輔理功臣之號冬遷匡請大夫判厚德府事兼判典醫寺(시)事上護軍癸亥春拜門下評理商議冬封晉山君階重大匡庚午夏匡靖大夫判慈惠府事上護軍同判都評議司事冬加授推忠補祚功臣大匡商議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判繕工寺(시)事左右衛上護軍皆公歷官也大夫人尚無恙11)公兄弟及公之子相繼入相府12)赫赫耀一世姜氏既大振矣壬申公年五十四大夫人乃卒公廬墳13)三年人嘉其孝建文二年庚辰十一月二十六日以病卒于第享年六十二訃聞命有司庀喪事贈諡恭穆明年三月辛巳以禮葬于臨江縣之東原公天性謹恪風采嚴重發言處事務循禮則事親以孝繩家以儉歷任中外守法不呵人多嚴憚之夫人河氏重大匡晉川君諡元正公楫之女生男五人曰淮伯丙辰科進士第歷任臺諫以判密直觀察交州江陵道陞政堂文學及還兼大司憲以言事罷己卯冬起爲正憲出尹鷄林庚辰秋東北面都巡問使曰淮仲壬戍科進士第嘉善洪州牧使曰淮顺司宰少監曰淮叔諸衛將軍曰淮季己巳科進士第重大匡晉原君先公沒14)孫男女若干人政堂15)娶鄭氏重大匡蓬原君良生之女先亡生男宗德司憲監察曰友德監門衛散員曰進德女二人長適權務金張次幼繼室16)李氏重大匡平壤府尹諱存性之女生男二人皆幼牧使17)娶南氏判事徵之女生男曰安壽濟用庫主簿繼室崔氏知成州事諱寧之女生男二人皆幼少監18)娶内侍全理之女生女幼將軍19)再娶安氏贊成事諱沼之女生男女二人洪氏無嗣監察娶典書李廷堅之女生男二人皆幼銘曰 瞻彼晉陽有姓曰姜世有儒顯王廷20)以揚烈烈博士海國21)是使其從以行迺有孝子孝子繼征風濤與兵既危既險瀕死22)而生戒子苦孫無儒爾門23)吾非以儒豈慄吾魂子孫承訓由吏而進三世復始其家克振顯允24)文敬積德之慶公相25)承承門閥之盛偉矣恭穆威儀抑抑率履不回26)邦之司直27)有嗣其賢欲傳可傳謁文太史28)于墓是鐫我辭非諛可以示後彌千百年永昭不朽
左贊成 陽村 權近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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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釋>
1) 建文건문:명明나라 혜제惠帝의 연호年號.
2) 先子선자:선대 아버지(先君)나 스승.
3) 附葭부가:인척관계
4) 望族망족:명문귀족
5) 元東征원동정:원元나라의 일본정벌日本征伐
6) 兵交병교:전쟁. (至元,至正:원나라 말기의 연호)
7) 儒術유술:유가의 학술.
8) 門蔭문음:조상의 음덕
9) 丁憂정우:부모의 상을 당함.
10) 起復기복:기복출사起復出仕 즉 상중喪中에 기용됨.
11) 無恙무양:몸에 탈이 없음.
12) 相府상부:宰相의 邸宅.
13) 廬墳여분:시묘侍墓살이.
14) 先公沒선공몰:공公보다 먼저 죽다.
15) 政堂정당:[회백淮伯]을 지칭
16) 繼室계실:두 번째 부인.
17) 牧使:[淮仲]을 지칭
18) 少監:[淮順]을 지칭
19) 將軍:[淮叔]을 지칭
20) 王廷왕정:조정朝廷
21) 海國:섬나라[일본]
22) 瀕死빈사:거의 죽을 지경에 이름.
23) 爾門이문:너의 집안.
24) 顯允현윤:덕이 밝고 성의가 있음.
25) 公相공상:공경대신과 재상.
26) 率履不回솔이불회:실행에 어김없음.
27) 司直사직:모범
28) 太史태사:기록을 맡아보던 관리.
< 鑱새길참. 叮신신당부할정. 雪씻을설. 中급제할중. 拜벼슬받을배. 荐천거할천. 知맡을지. 尉벼슬이름위. 俄잠시아. 甫클,겨우보. 期일년기 呵꾸짖을가. 第집제,과거제. 庀다스릴비. 恪삼갈각. 楫노즙. 鐫새길전. 諛아첨할유. 謁청할알. 彌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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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번역 : 한국고전번역원 장순범
공목공묘비명
건문(建文) 3년 경진(정종 2년, 서기 1401년) 겨울에 진양(晋陽) 강공(姜公) 회백(淮伯)이 그의 아버지 공목공의 행력을 가지고 와서 묘비문을 써주기를 청하며 하는 말이
“우리 아버님은 근검으로 몸을 다스리시고 벼슬하실 때에는 신중을 기하여 그 명예와 공적이 크게 나타난 분으로 가히 후세에 전할 만한데, 진실로 비석에 새겨두지 못하면 내가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
며 지팡이를 던지고 이마를 조아리며 울면서 간청하니, 나도 인척관계일 뿐더러 공의 부자와 안 지 오래되므로 의리상 사양치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시(蓍)로 진양에서 이름난 집안이다. 5대조는 국자박사 계용(啓庸)이고 그의 아들은 전중내급사 인문(引文)이다. 다 높은 선비로서 이름이 났다. 박사공이 처음 일본 통신사 서장관이 되어 현지로 가실 때 아들 급사공이 따라가셨다.
그 후 원나라가 일본을 칠 때에 급사공이 길을 잘 안다 하여 다시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험난한 풍랑과 전쟁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서 벼슬을 그만 두고 자손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선비가 아니었으면 이 같은 험난한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니, 너희는 선비로 벼슬 을 하지 말라.”
하셨다.
그 때문에 아들 감찰어사 사첨(師瞻)과 손자 판도정랑 창귀(昌貴)가 모두 서리(과거를 거치지 않음) 벼슬을 하셨으니, 어사공은 공의 증조부요, 정랑공은 공의 조부인데 후에 문하시중 진원부원군에 증직되셨으며, 부친은 봉산군으로 문경(文敬) 시호(諡號)를 받은 군보(君寶)이시다. 부친 문경공은 성품이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셨으며 조부 진원부원군도 선비의 공부로 선세의 가업을 이어 가도록 과거 보기를 허락하니 또 다시 유학을 일삼아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러 집안이 흥왕했다.
아! 급사공의 훈계는 일시적인 곤욕을 징계했던 것으로 동정(東征:일본을 침)의 군사(원나라
군사)들이 바다에서 죽어 고기 뱃속에 장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이가 많은데, 이 어찌 선비 탓이라 할 것인가. 진원군이 그 아들을 가르침과 문경공이 집안을 일으킨 것은 다 하늘의 계시로 그의 한을 씻고 경사로 창성케 한 것이리라.
문경공이 계림 김씨 전객령 여진(呂珍)의 딸을 맞아 지원 기묘년(1339년) 겨울 12월 22일 공을 낳으셨다. 지정 병술년(1346년) 공의 나이 8세 때 집안 음덕으로 연릉직을 보직 받고 19세 되던 정유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으며 임인년에 대관서승에 제수 되었으며 다시 낭장을 두 번 지내고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겸직하고 전공좌랑(典工佐郞)과 광흥창사(廣興倉使)를 거처 번거로운 일을 신속하고도 민첩하게 다스려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했다. 합문인진부사가 되어서는 행동을 예법에 맞도록 하여 조열대부(朝列大夫:正四品)의 품계를 더했으며, 외직으로 합천 고을을 다스렸는데 정치 행적이 현저하였다. 전법판도전리(典法判圖典理)와 총랑 중현윤 위전중과 정삼사 좌윤, 봉순대부로 군기시판사를 지냈으며 강릉도안찰사로 나가니, 이때가 홍무 무오년(1378) 추동이다.
이듬해인 기미년(1379)에 통헌판선공시(通憲判繕工寺)에 제수되고 봉익대부(奉翊大夫:從二品)에 승진되었으며, 또 이듬해에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가 되었을 때, 부친(문경공)께서 세상을 떠나 장례를 마치고, 겨우 일 년 만에 다시 좌상시에 기용되고 임술년에 판도판서로 전직되고 이어서 밀직에 들어가 부사(副使)가 되었고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에 오르셨다.
그 해 겨울에 광정대부 판후덕부사(匡靖大夫·判厚德府事)로 옮기어 판전의시사 상호군(判典醫寺事上護軍)을 겸직하고 계해년 봄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에 배명하고 겨울에 진산군(晉山君)에 봉하니 계급은 중대광(重大匡, 從一品)이었다.
경오년 여름에 광정대부 판자혜부사 상호군 동판도평의사사사가 되고 겨울에 추충보조공신 대광상의문하찬성사와 동판도평의사사사 판선공시사 좌우위 상호군의 직첩을 더하니 이것이 공의 관직 경력이다.
대부인(모친)이 여전히 건강하고 공의 형제와 아들이 계속하여 정승 자리를 이어 받으니 일세에 혁혁한 빛을 발하여 강 씨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임신년 공의 나이 54세에 대부인이 별세하니 공이 삼년 시묘(侍墓)를 하니 모든 사람이 공의 효성을 아름답게 여기었다.
건문 2년(1400) 경진 11월 26일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공의 나이 62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자 유사를 명하여 호상케 하고 시호(諡號)를 공목(恭穆)으로 내렸다. 이듬해 3월 갑
인에 임강현 동쪽 언덕에 예장으로 모시었다.
공은 천성이 삼가고 정성스러웠으며 풍채가 엄중하며 말과 행동을 예법에 따르고 부모에 효도하고 집안을 검소하게 다스렸으며, 안팎으로 벼슬을 지내되 법을 지켜 아첨하지 않으니 사람마다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부인 하씨(河氏)는 중대광 진천군 시호 원정공 하집의 따님이다. 아들은 다섯을 두었는데, 큰아들 회백(淮伯)은 병진년 진사에 급제하여 대간을 역임하였으며 판밀직을 지내고 교주와 강릉도 관찰사를 거쳐 정당문학에 승진되어 돌아와서 대사헌을 겸했는데 언사로 파직되었다.
기묘년 겨울에 다시 기용되어 정헌대부(正二品)로 계림부윤으로 나갔다가 경진년 가을에 동북면 도순문사를 지냈다. 둘째 아들 회중(淮仲)은 임술년에 진사에 등과 하여 가선대부 홍주목사를 지냈으며, 셋째 아들 회순(淮順)은 사재소감을 지냈고, 넷째 아들 회숙(淮叔)은 제위장군이며, 다섯째 아들 회계(淮季)는 기사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중대광 진원군이 되었으나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손자와 증손 남녀가 약간 명 있으니 정당[淮伯]은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첫 배위 정씨(鄭氏)는 중대광 봉원군 양생(良生)의 딸로 공보다 먼저 별세하고,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으니, 종덕(宗德)은 사헌부 감찰, 우덕(友德)은 감문위산원, 끝은 진덕(進德)이며, 맏딸은 정언 김장(金張)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어리다. 다음 배위 이씨(李氏)는 중대광 평양부윤 존성(存性)의 딸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목사(牧使:淮仲)는 판사 남징(南徵)의 딸을 아내로 맞아, 큰아들 안수(安壽)는 제용고 주부이며, 둘째 부인 최씨(崔氏)는 지성 주사 영(寧)의 딸로 아들 둘은 모두 어리고, 소감(少監, 淮順)은 내시 전이소(全理昭)의 딸을 맞아 딸을 낳았는데 어리고, 장군(將軍, 淮叔)의 배위 안씨(安氏)는 찬성사 소(沼)의 딸인데 아들 딸 둘을 낳았으며, 재취 홍씨(洪氏)는 자식이 없으며, 감찰(監察)은 전서 이정견(李廷堅)의 딸을 맞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저 진양 땅에서 강씨(姜氏)들이 살았는데,
대대로 선비가 태어나 왕정을 드러냈네.
장하도다! 박사공(博士公:啓庸)이 사신(使臣)으로 일본 갈 때,
아들[引文]도 따라가니 효자가 아니던가.
후일 효자[引文]가 사신(使臣)으로 일본 갈 때
풍랑과 전쟁으로 구사일생 겨우 살아와,
자손에게 훈계하길 너희들은 선비 되지 말라했네.
선비가 아니었던들 어찌 혼(魂)을 놀랬으랴.
자손들이 교훈 받아 학문에만 전념하다 3대 후에,
다시 나가 가문에서 드러난 문경공(文敬公) 군보(君寶)는
덕을 쌓아 경사慶事 났네.
승상(丞相)자리 이어가서 문벌(門閥)이 번창했네.
위대한 공목공(恭穆公) 시(蓍)는 위풍도 당당하고
공평무사 행한 업적 나라에 모범되니
그 공덕을 길이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태사(太史) 글을 받아 묘비에 새기노라.
내 이 말은 아첨이 없어 후세에 전할 만하니
천 백년 지나도 변치 않고 빛나리라.
좌찬성(左贊成) 양촌(陽村) 권근(權近)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