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숙(漢文學塾)/선비메일함

73. 드라마<징비록>과 하회마을

주비세상 2015. 3. 15. 16:10

 

 

‘혼이 났으니 조심하자’ <징비록(懲毖錄)>

 

 

 

현재 KBS 1TV에서 주말 대하드라마로 방송 중인 “징비록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은 조선 선조 때 ‘하늘이 내린 재상’으로 칭송받았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집필한 ‘징비록’(국보 제132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징비’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다.

당시 전시 총사령관격인 영의정 겸 도체찰사였던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전란의 현장에서 척간두의 조선을 이끌었기에 누구보다 전란의 참혹함과 그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온 몸으로 겪은 전란을 집필하여 환란을 경계해야한다는 메시지를 후세에 전하고 싶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자락의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저술했다.

『징비록』은 1647년(인조 25)에 간행되었다. 1695년(숙종 21)에 일본 경도(京都) 야마토야에서 중간(重刊)되어,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으나 중국에 까지 유출되어 고위관리들에게 애독되었다고 한다.

 

류성룡의 업적을 간략히 요약하면,

 

1. 정확한 국제정세를 판단하여 국방안보체제를 확립하고 성곽수축, 화기제조, 병사 조련,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2, 왜란을 피하여 북으로 몽진을 떠난 선조 임금님께 압록강을 넘지 못하게 강력하게 막았다.

3. 군사개혁을 단행하여 직업군인양성기관인 훈련도감을 설치하였고 양반도 병역의무(군역)를 부과시켰다.

4, 조선의 군사 방어 체제를 진관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군사 전략가였다.

5. 이순신과 권율 등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을 믿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구명했다.

6. 임진강에 부교(浮橋)를 창안하여 군수품 이송을 원활히 했다. (미국 사학자 헐버트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부교를 들었다.)

 

하회마을을 간략히 소개하면,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S자로 감돌아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다. 기암절벽과 호수, 장송(長松)과 백사장이 만들어내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치와 전통 가옥의 멋스러운 자태, 그 속에서 재현되는 회회탈춤과 다양한 풍물로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당산나무가 있다. 이 마을의 모든 가옥의 좌향은 이 나무를 등지고 사방팔방으로 지었으나 자좌오향(子坐午向)은 없다고 한다.

 

* 부용대(芙蓉臺)-하회마을 서쪽 낙동강 건너 우뚝 솟은 절벽(西厓:유성룡의 호)인데 이곳에 오르면 물위의 피어오르는 연꽃(부용:하회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누대라는 뜻.

 

 

*영모각(永慕閣)-징비록 등 서애 류성룡의 유물전시관.

 

 

* 옥연정사(玉淵精舍)-유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한 정자. 부용대 북쪽 기슭에 있음.

 

 

* 충효당-서애 류성룡의 종택.

 

 

 

*양진당(養眞堂)입암고택(立巖古宅)-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의 종택 

 

 

 

* 병산서원(屛山書院)-유성룡을 배향한 서원. 하회마을 동쪽 화산(花山) 너머에 있고 한국 서원 건축물의 백미(白眉).  

 

 

 

* 겸암정사(謙菴精舍)-유성룡의 형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의 정자.

* 화천서원(花川書院)-유성룡의 형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을 배향한 서원.

 

                                                                                              <글:주비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