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숙(漢文學塾)/한문반행사

예천문화탐방자료(2013.5.27)

주비세상 2013. 5. 23. 19:59

 

 한문반 예천문화탐방 자료(5.27)

 

 

 

1. 安東 韓紙 공장과 호암피아 미술관

안동시 풍산면 소산리에 위치한 안동한지공장은 질 좋은 닥종이를 엄선하여 전통적인 한지제조법을 고집하고 있어 직접 한지를 만들어 보고 질 좋은 한지를 구입할 수 있다. 한지공예작가인 권영순 선생의 유천미술관을 관람할 수 있다. 최근에는 현존 한국 최고의 필사본 화엄경인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이 2년 영인 끝에 공개됐다.

호암피아 미술관은 안동한지공장 입구에는 민화의 창조적 계승을 통해 전통회화를 확립하기 위해 호암 김태암 화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작품 중에는 몇 백만 원에서 억대를 호가하는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2. 醴泉 石松靈(천년기념물 제294호 1982.11.13지정)

이 나무는 부귀(富貴), 장수(長壽), 상록(常綠)을 상징(象徵)하는 반송(盤松)으로, 크기는 수고(樹高) 1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 4.2m, 수폭 동서(東西) 32m, 남북(南北) 22m이며, 그늘 면적은 1,000㎡에 이르는 큰 소나무로서 수령(樹齡)이 6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마을의 단합(團合)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목(洞神木)으로 보호받으며 매년 정월(正月) 대보름에 동신제(洞神祭)를 올리고 있다.석송령(石松靈)의 유래(由來)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洪水)가 났을 때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주민들이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1927년 8월 경에는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란 사람이 영험(靈驗)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 토지 3,937㎡를 상속(相續) 등기해 주어 이 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樹木)으로서는 토지를 가진 부자(富者)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재산을 가지고 세금(稅金)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5년에는 새마을사업을 잘한다고 하여 대통령(大統領)이 준 500만원으로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장학회를 조직하여 고향의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도 주고 있다. 석송령에 얽힌 여러 전설에 의하면1) 일제시대에 이 나무를 제거하여 민족(民族)의 정기를 말살하고 일본(日本) 군함(軍艦)의 재료(材料)로 활용하고자 일본인이 인부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려고 톱과 장비를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석송령 부근의 개울을 건너오는데 갑자기 자전거 핸들이 뚝 부러져 순사(巡査)는 목이 부러져 죽었고, 인부들은 영험스러운 이 나무를 보자 겁에 질려 달아나서 무사했다.2) 그리고 한국전쟁(1950) 때는 인민군(人民軍)이 석송령 나무 밑을 야전병원(野戰病院) 막사로 사용하였는데, 폭격(爆擊)을 받아 피해를 보았으나 우산(雨傘)모양의 이 나무 밑에는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아 영험스러움을 증명하였다 한다.3) 지금도 학질에 걸리면 소나무에 가서 절을 정중히 하고 기도(祈禱)를 드리면 병(病)이 낫는다고 전해진다.4) 이 소나무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정월(正月) 대보름이나 각종 마을행사가 있으면 1년에 10말 이상을 마신다고 한다. 그것은 한 번에 막걸리 5말씩을 행사 후에 나무뿌리 주변에 살포(撒布)한다.

 

3. 醴泉 回龍浦(경북 예천군 용궁면 회룡포길 362(대은리 395외) 강이 산을 부둥켜 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도리마을로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이곳은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인근 비룡산은 숲속 등산로와 원산성, 봉수대 등 역사적 정취가 숨 쉬는 자연공원으로 산책과 등산코스로 적합하다. 또한 이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운명선사가 세운 천년고찰 장안사가 산중턱에 있으며 이 사찰의 뒷산에 올라가면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어 회룡포 마을의 절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인다.2000년도에 방영되었던 KBS 인기드라마 『가을동화』의 초기배경이 이곳 회룡포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4. 醴小白山 龍門寺(경북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내지리 391)신라 경문왕 10년(870)에 두운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예천군의 관광명소이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백산 용문사에는 국내최고를 자랑하는 것이 있다. 맞배기와 지붕의 균형미를 보여주는 고려 명종 3년(1173)에 초건한 목조건물 대장전(보물 145호), 회전식 불경보관대인 국내유일의 윤장대(보물 684호), 대추나무에 불상을 조각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목불좌상과 목각탱(보물 989호), 불국사의 것보다 규모가 더 웅장한 사천왕상 일주문이 있다. 이외에도 조선 세조의 친필수결의 용문사교지(보물 729) 등 보물과 다수의 문화재를 간직한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태조가 삼한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두운 대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니 운무가 자욱한데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더니 절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하여 태조는 산 이름을 용문산, 절 이름을 용문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o 入此門來 莫存知解 無解空器大道成滿   o 色卽是空 空卽是色 o 話頭 o 一切唯心造 o 心外無法

 

                                       < 용문사 應眞殿 柱聯>

        圓覺山中生一樹 원만히 깨친 산중에 나무 한그루 있어,

        開花天地未分前 천지 창조 이전에 꽃을 피웠네.

        非靑非白亦非黑 푸르지 않고 희지도 않고 또한 검지도 않고,

        不在春風不在天 봄 바람도 없고 하늘도 없다네.

 

 

5. 醴泉 草澗亭 園林(경북 예천군 용문면 용문경천로 874(죽림리 350외 2필)초간정 원림은 용문면 원류마을 앞 계류가 굽이쳐 흐르는 암반 위에 세워진 초간정과 주변 자연 경관이 하나의 아름다운 전통원림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곳으로 선조들의 무위자연사상을 보여주며, 바위를 휘돌아 흐르는 계류가 시원한 운치를 자아내고 주변 송림 및 바위가 어우러져 경관적 가치가 매우 크다.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大東韻部群玉’을 저술한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초간 권문해(1534∼1591)가 1582년 지은 정자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4년(1612) 재건했다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다시 붕괴된 것을 권문해의 현손이 세운 것으로 정자는 정면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일반 주택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건물 안쪽을 장식하여 꾸민 수법이 뛰어난 조선시대 별당 건축이다. 보존 상태가 우수한 조선 중기 건물로 조선 건축의 구조와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별당채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세우고, 중간 앞에 여러 단의 석축을 쌓아 건물 전체가 매우 높고 웅장하며 고졸한 멋을 풍긴다.

權文海 草澗日記는 조선 명종∼선조대의 학자이며, 관료인 권문해(1534∼1591)가 쓴 자필일기이다. 임진왜란 이전 관료가 쓴 일기로서 다 타고 없어진 임진왜란 이전의 역사적 자료를 보완하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상세히 적고 있으므로 이를 통한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고, 중앙의 관료직과 지방관을 지내면서 직무수행에 관한 여러 문제를 다룬 일기인만큼 조정에서 일어난 일은 물론 지방관아의 기능과 관리들의 생활, 당쟁관련 인물 및 정치, 국방, 사회, 교육, 문화, 지리 등 전반에 걸쳐 살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6. 醴泉 金堂室 마을과 金谷書院 (주소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542-1 외)

금당실은 마을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 초 감천 문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妻鄕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을 勝地라고 일컫는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이곳! '금당실은 우리나라 十勝地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못한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다음은 鄭鑑錄에 南師古가 꼽은 十勝之地이다.

 

 1.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2.무주(茂州)의 무풍(茂豊).  3.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4.부안(扶安)의 변산(邊山). 5.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 6.봉화(奉化)의 춘양(春陽). 7.예천(醴川)의 금당곡(金唐谷). 8.영월(寧越)의 정동상류(正東上流). 9.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10.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감천 문씨가 이곳을 개척할 때 지형을 보니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으로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이 생산되기도 하여 금당곡, 금곡, 금당이라고 불렀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하여 금곡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 古家屋과 迷路로 연결되어 있는 돌담길이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마을로서 역사, 문화, 전통이 강한 곳이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하여 재향 올리는 추원재,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 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 이외에도 개량된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금당실 송림은 약 800m에 걸쳐 소나무 수백그루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1863년 동학을 전파하던 최제우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과정에서 민심이 동요되어 큰 나무들이 일부 벌채되고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 구출 비용 마련을 위한 나무 벌채가 심하여 1895년(고종 32년)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9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하여 왔다고 한다.金谷書院은 치암 박충좌(恥庵 朴忠佐: 1287~1349년) 선생을 主享으로 박눌, 박손경 선생을 配享하고 있다. 박충좌는 오늘의 冠婚喪祭 즉‘주자가례(朱子家禮)’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이 땅에  새로운 풍속을 뿌리 내리게 한 분이며, 이제현과 함께 임금의 스승으로 임금에게‘정관정요(貞要)’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7. 龍宮鄕校와 醴泉鄕校용궁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m 지점에 처음 세워졌으며, 정종 2년(1400)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중종7년(1512)에 이곳을 복원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그 후 선조 36년(1603)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인조 14년(1636)에 세심루를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예천향교는 조선 태조 7년 서본리에 처음 지었고 태종 18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 교육 공간인 명륜당, 대문 격인 외삼문과 음식을 준비하는 곳인 주사가 남아 있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하고 있다. 건축 당시에는 풍영루(諷詠樓)·전곡청(典穀廳)·동서무(東西무)·동서재(東西齋)·이층 문루(二層 門樓)등 9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만이 있다.

 

8. 醴泉 揚水發電所 (위치 : 상부지-용문면 선리.  하부지-하리면 송월리)

한국수력원자력(주)예천양수발전소가 8여년의 공사 끝에 준공.

공사기간 : 2003.09 ~2011.12

공사금액 : 7,470억원

설비용량 : 80만KW(40만KW * 2기)

 

 

9. 醴泉 三江酒幕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길 27)

내성천,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라 三江이라고 한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이곳은 보부상들이 많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 곳이라고 한다.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련 할머니의 외상장부로도 유명하다.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들에게 요기를 해주거나 숙식처를 제공하던 건물로서, 1900년 무렵 건축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본래 기능에 충실한 평면구성으로, 건축사적 희소가치와 옛 시대상을 보여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낙동강 700리 유일한 주막인 삼강주막은 2006년 酒母 유옥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2007년 예천군에서 1억 5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주막 주변에 보부상숙소, 사공숙소, 공동화장실 등을 함께 지었는데, 보부상숙소는 면적 40.41㎡로 방 2개와 대청, 부엌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공숙소는 면적 21.60㎡로 방 2개를 들였다.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 약 500년 된 회화나무가 서 있어 옛 정취를 더해준다. 이 회화나무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상주군에 있는 한 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도 나지 않고 큰돈을 번다하여 연장을 가지고 이 나무를 베려하므로 사람들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스런 나무라 하여 베지 못하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나무그늘이 좋아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하므로 꿈에서 깨어나니 식은땀을 흘리며 겁에 질려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 삼강주막 054)655-3035

                                                                                                         * 제공 : 주비세상(http://blog.daum.net/jbksm)